밥 먹으러 오슈 전화받고 아랫집 갔더니 빗소리 장단 맞춰 톡닥톡닥 도마질 소리 도란도란 둘러앉은 밥상 앞에 달작지근 말소리 늙도 젊도 않은 호박이라 맛나네, 흰소리도 되작이며 겉만 푸르죽죽하지 맘은 파릇파릇한 봄똥이쥬, 맞장구도 한 잎 싸 주며 밥맛 없을 때 숟가락 맞드는 사램만 있어도 넘어가유, 단소리도 쭈욱 들이켜며 달 몇 번 윙크 하고 나믄 여든 살 되쥬? 애썼슈 나이 잡수시느라, 관 속같이 어둑시근한 저녁 수런수런 벙그러지는 웃음소리 불러주셔서 고맙다고, 맛나게 자셔주니께 고맙다고 슬래브 지붕 위에 하냥 떨어지는 빗소리 김해자(1961~) 김해자 시인이 최근에 시집 을 펴내면서 ‘시인의 말’에 이렇게 썼다. “사람과 꽃과 나비와 알곡과 대지에 경배하며. 그 모든 계절의 바람과 떨어진 꽃과 주검들이..
물속이 들여다보여 봄이 온 줄 알았다 저녁엔 강으로 나가 물속까지 자라는 벚나무를 보았다 물속까지 핀 벚꽃을 보았다 물속까지 벚꽃 피어 봄도 절정인 줄 알았다 자꾸 눈길이 가서 네가 온 줄 알았다 내 안에서 밤낮없이 피어나는 너를 보았다 벚꽃 눈부신 봄날 내내 네 안에도 벚꽃을 피우고 싶어 사랑인 줄 알았다 - 오창렬 (1963~) 물속이 훤히 보인다는 것은 사랑하는 이의 속마음이 그처럼 잘 보인다는 것일 테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물비늘이 반짝이고, 맑은 물은 거울 같고, 바닥에는 고운 모래가 쌓였다 살살 풀리며 흐른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 안쪽에는 꽃이 피어 향기와 빛깔의 절정을 보여준다. 사랑하면 또 어떤 기미에 의해 눈이 자꾸 한 곳으로 가게 되니, 미묘한 알아차림이 있으니, 눈길이 가..
가슴에 별이 진 사람 초도로 가라 여수항 뱃길로 48마일 삼산호, 신라호, 덕일호, 훼리호, 순풍호, 데모크라시, 줄리아나 오가고 뱃길 빨라질수록 발길은 멀어도 해초처럼 설레는 낭만은 있다 이슬아침 소바탕길로 상산봉에 오르면 낮고 낮은 햇살에도 퍼덕이는 금비늘 희망은 가슴 터질 듯 수평선에 이르고 달빛 수줍은 갯바탕길을 따라 은하수와 시거리 이야기꽃 정다운 초도, 그 아름다운 풀섬에 가면 아직도 총총한 별들이 뜬다 김진수(1959~) 시인은 고향 초도에 대해 말한다. 초도(草島)는 풀이 많은 풀섬이라고 한다. 여수에서 여객선을 타고 남쪽으로 가면 있는 이 초도에는 상산봉이 우뚝 솟아 있다. 상산봉에 올라서 내려다보면 갯바람 언덕이 있고, 파도가 하얗게 무너지는 바닷가가 있고, 밀물과 썰물이 흐르는 해조음..
새벽에 창을 사납게 두드리던 비도 그치고 이른 아침, 햇살이 미친 듯 뛰어내린다 온몸이 다 젖은 회화나무가 나를 내려다본다 물끄러미 서서 조금씩 몸을 흔든다 간밤의 어둠과 바람 소리는 제 몸에 다 쟁였는지 언제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느냐는 듯이 잎사귀에 맺힌 물방울들을 떨쳐 낸다 내 마음보다 훨씬 먼저 화답이라도 하듯이 햇살이 따스하게 그 온몸을 감싸 안는다 나도 저 의젓한 회화나무처럼 언제 무슨 일이 있어도 제자리에 서 있고 싶다 비바람이 아무리 흔들어 대도, 눈보라쳐도 모든 어둠과 그림자를 안으로 쟁이며 오직 제자리에서 환한 아침을 맞고 싶다 - 이태수(1947~) 요란하게 천둥과 번개, 돌풍을 동반한 비가 새벽에 쏟아지더니 “언제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느냐는 듯이” 날이 환하게 갰다. 시인은 창 너..
큰 것을 도둑맞은 것 같다 거친 숨 몰아쉬며 여기까지 왔는데 무엇이 다녀간 것일까 아무것도 없다 공허뿐이라고 그냥 가 보는 거라고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구구구 모이 몇 알 주워 먹느라 할퀴며 깃털 뽑히며 두 날개 뭉개졌는데 벌써 떠나야 한다고 한다 어디를 흔들어야 푸른 음악일까 가랑잎도 아닌데 자꾸 떨어져 내리다가 내일은 어디일까 정말 어디를 흔들어야 다시 푸른 음악일까 문정희(1947~) 일이 술술 풀리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간곡한 기대는 곧잘 도둑맞는다. 그럴 때는 “거꾸로 뒤집혀 버둥거리는/ 풍뎅이처럼” 되기도 한다. 허허벌판에, 폐허에 홀로 서게 되기도 한다. 무엇이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이끌었을까. 시인은 이러한 일들에 대해 탄식을 실어서 시 ‘모래언덕이라는 이름의 모텔’을 썼고, ..
우리가 누린 적 있는 눈부신 시간들은 잠시 걸친 옷이나 구두, 가방이었을 것이나 눈부신 만큼 또 어쩔 수 없이 아팠을 것이나 한번쯤은 남루를 가릴 병풍이기도 했을 것이나 주인을 따라 늙어 이제 젊은 누구의 몸과 옷과 구두와 가방 아픔이 되었을 것이나 그 세월 사이로 새와 나비, 벌레의 시간을 날게 하거나 노래하게 하면서 이제 그 시간들마저 허락도 없이 데려가는 중일 것이나 박라연(1951~) 우리는 빛이 가득한 때를 살기도 한다. 흐뭇하고 황홀한 시간을 살기도 한다. 시인은 그 시간을 옷과 구두와 가방을 걸치는 일에 비유한다. 그러나 눈부신 시간은 짧고, 연속적이지 않고, 사라진다. 마치 생화로 만들었으나 시들어 버리는 꽃다발처럼. 그렇지만 그 기쁜 순간들 덕택에 우리들은 삶이라는 의복의 낡음을 잠시 가..
새들은 다 어디로 갔나 낙동강 청천강으로 백두산 한라산으로 훨훨 날아갔겠지 가서 잘 살겠지 식구들 늘어나면 봄바람에 소식 전해주겠지 새끼들 자랑하러 얼싸안고 오겠지 새들아, 훨훨 날아가라 김수복(1953~) 모여 살던 새들은 남쪽과 북쪽으로 날아가 흩어졌다. 영남을 휘돌아 남해로 흘러들어가는 낙동강으로 새들은 날아갔다. 평안도를 지나 황해로 흘러들어가는 청천강으로 새들은 날아갔다. 하얀 모래밭과 수풀과 들판과 습지와 마을로 날아갔다. 백두산과 한라산으로 멀리멀리 높이 날아갔다. 새들은 둥지를 짓고 하얀 새알을 낳겠지. 그러고는 눈 녹고 냇물이 다시 흐르는 날에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가면 서로의 안부를 실바람에 서신처럼 실어 보내겠지. 어느 날에는 새끼들을 업고 안고 옛날에 모여 살던 곳으로 돌아오..
마당가에 냉이꽃이 피었습니다 냉이꽃 저만치 조그만 돌멩이가 있습니다 돌멩이는 담장 그늘이 외로워서 냉이꽃 곁으로 조금씩 조금씩 굴러오는 중입니다 종달새도 텅 빈 하늘이 외로워서 자꾸 땅으로 내려오는데 그것도 모르는 냉이꽃이 냉이꽃이 종달새를 던지는 봄날입니다 유금옥(1953~) 나는 유금옥 시인의 동시를 좋아한다. 전교생이 열 명 남짓한, 대관령 골짜기의 초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걸작이다. 동시 ‘왕산초등학교’에서 “우리 학교는 산이 있네/ 우리 학교는 책이 많네/ 우리 학교는 놀이터가 있네/ 우리 학교는 새들도 많네// 우리 학교가 지지배배 웃네”라고 썼다. 시 ‘냉이꽃’에도 아이의 맑고 순수한 동심의 나라가 있다. 냉이에게는 흰 꽃들이 잇달아 피었다. 돌멩이는 담장의 그늘에 있으면서 말을 나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