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에서 우연히 아는 이를 만났다. 그는 양손에 묵직한 가방을 들고 어깨에도 큼지막한 가방을 짊어지고 있었다. 가방에는 그가 겨우내 깎고 벼리고 달구며 담금질한 작품들이 들어 있었다. 그는 야심 차게 만든 새 작품을 보여주고 싶어 지하철 의자 위에 가방을 펼쳤다. 까만 벨벳 상자에 고이 들어있는 장신구들을 꺼내는 그의 가녀린 손을 보고 있자니 짠한 마음이 들었다. 이걸 하나하나 만들어 상자에 넣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은을 깎아 만든 팔찌를 내 손목에 채워주면서 눈치를 살폈다. “자꾸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너무 꾸물거렸어요. 그래서 몇 달 동안 새 디자인만 궁리했는데, 어떨지 모르겠어요.” 예술가는 누구나 어제보다 오늘이 낫길, 오늘보다 내일이 더 찬란하길 바란다. 바란다는 것은..
매서운 바닷바람 탓일 것이다. 작은 항구를 에두르고 있는 나지막한 산에는 봄이 오지 않았다. 진달래는 아직 피지 못했고, 개나리도 보이지 않았다. 내달리는 차를 타고 지나쳐온 온 산이 불긋불긋 봄빛으로 물들어 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항구로 걸어가는 길은 자갈이 나뒹굴며 흙먼지가 일었다. 도시 한복판 두꺼운 보도블록 틈새로도 민들레를 피워내는 봄이 이곳에는 닿지 않았다. 그러니 봄 구경이 아니었다. 양산을 펼친 할머니가, 선글라스를 낀 아주머니가, 배낭을 멘 아저씨가, 조잘조잘 떠드는 학생들이 줄지어 항구로 걸어가는 것은 봄볕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선착장을 걸으면서 한쪽 벽에 길게 이어 붙인 타일들을 내려다봤다. 간절한 바람과 아픔을 적은 글귀를 읽다가 드문드문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는 바다를 바라봤..
벚꽃 잎이 난분분히 날리는 봄날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생각한다. 화사하게 피어난 벚꽃 아래에서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은 아이들. 그 사진에서 나는 만난 적도 없는 두 아이를 알은체하며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내가 그들을 몰랐을 때 그들은 그곳에 있었으나, 내가 그들을 알았을 때 그들은 그곳에 없었다. 영원히 그들을 몰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아이가 키운 고양이 이름은 다윤이다. 아이는 다윤이를 동생으로 여겼다. 다윤이는 내내 언니 책상 한 귀퉁이에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아마도 그 자리는 오래전부터 다윤이의 자리였을 것이다. 다윤이는 내가 아이의 초등학교 때 일기를 훑어보는 걸 우두커니 내려다봤다. ‘아빠가 부대찌개를 해주셨다. 너무 맛있어 많이 먹었다. 체했다.’ 아이가 2학년 때 쓴 이날 일기의 ..
기억한다는 것은 뇌에 저장되어 있는 뭔가를 그대로 끄집어내는 게 아니라, 새롭게 짜깁기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온전한 기억이란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광주민중항쟁의 피해자라고 말하는 건 정말 끔찍하다. 그의 기억을 개인의 기억으로 용인해서는 안된다. 그의 왜곡되고 변질된 기억은 우리 역사의 진실을 전복시키는 범죄다. 1980년 봄 정권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던 그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겠지만, 광주는 평화로웠다. 동물원 캥거루와 사슴은 순산했고, 광주일고와 광주상고가 대통령배 고교야구 결승전에 올랐다. 결승전이 치러지는 날, 광주 시내는 두 학교를 응원하는 이들의 노랫소리와 함성으로 들썩였다. 그해 봄날 육상 선수였던 열세 살 소녀도 광주에 있었다. 전남 곳곳에서 뽑힌 선수들은 3개월..
그해 봄, 바다는 눈물이었다. 검은 섬을 휘감는 시퍼런 바닷물을 마주한 어머니의 멈추지 않는 눈물은 바다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다. 그대로 바다가 넘쳐 내 자식이 내 혈육이 멀쩡하게 뭍으로 나오기만 한다면 육신이 사그라진다 해도 울고 또 울었을 것이다. 시뻘겋게 녹슨 바닥을 드러낸 배를 보면서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또 울었다고 했다. 우는 것밖에 할 게 없어서 다리 뻗고 앉아 가슴 치며 울었던 그해 봄처럼. 자식을 잃은 어머니에게 봄은 또다시 되풀이되는 눈물의 봄이다. 건져 올린 배 앞에서 어머니는 낯선 항구로 부리나케 달려간 그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모두 구조했다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갔는데, 체육관은 텅 비어있고 행여 병원으로 갔나 싶어 물어보니 아직 아무도 병원으로 옮기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전화를 받은 그의 목소리는 꽤 진지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벌어진 거야? 그는 재빠르게 말을 내뱉고는 양옆을 주의 깊게 살핀다. 차들은 빈틈없이 달렸지만, 그는 능숙하게 운전대를 꺾어 버스전용차선에 들어섰다. “그러게 너무 시간이 벌어졌어. 알았어. 형, 내가 해볼게.” 운전대를 단단히 잡고 있는 손처럼 그의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가 있다. 그는 지금 형이라고 불리는 사람과 함께 대단한 결의라도 한 것처럼 들린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승객 하나가 그를 힐끔 쳐다본다. 무슨 일인 거야? 어쩌면 비밀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차들이 제각각의 목적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내달리고 있는 도로 위에서 그들은 세상을 놀라게 할 엄청난 계략을 세운 건 아닐까. 역시나 운전사는 정류소에 ..
할아버지께서 하시던 자전거포 옆에 책방이 들어선 건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다. 과자나 신발처럼 책을 파는 가게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약방, 미곡상회, 신발가게, 비료가게, 철물점, 솜틀집, 기름집이 늘어서 있는 장터 초입에 들어선 책방의 주인은 젊은 부부였다. 둘은 번갈아가며 책방을 지켰고, 나는 가게가 한가하다 싶으면 슬그머니 들어가 책 구경을 했다. 소년·소녀의 영원한 세계의 명작 문고 은 내가 가장 좋아한 책이었다. 나는 주인아주머니가 허락해준 만화책을 보는 틈틈이 을 슬쩍슬쩍 읽었는데, 그 책을 다 읽기 전에 책방은 문을 닫아버렸다. 울진 읍내에는 내가 어릴 적 드나들었던 책방과 같은 작은 책방이 있다. 책방 벽은 화사한 페인트칠이 되어 있고, 커피 냄새가 은은하게 퍼진다. 그곳에 앉..
진력나도록 긴 겨울이어서 한낮 차가운 바람에 숨죽이고 있는 봄뜻을 헤아려 봄이 온다 말하지만, 길바닥은 밤마다 차갑게 얼어붙을 것이다. 밤이면 고드러진 텐트를 들추고 들어가 누워 광화문 광장에서 꼬박 4개월을 보낸 이들의 밤은 여전히 한겨울이려니…. 겨우내 따뜻한 방안에서 낙장거리한 사람으로서는 길 위의 겨울을 짐작하기 어렵다. 보일러 불을 높이고도 어깨가 시리다 옷을 껴입을 적마다 광장 텐트 안에 앉아 있을 그가 생각났다. 그를 처음 본 건 용산참사가 일어나고 얼마 뒤였다. 피눈물과 함께 허물어진 용산 재개발 골목 틈새에서 용케 버티고 있는 작은 카페에 그가 있었다. 밤잠을 설치고 골목을 뛰어다니면서 일하는 그를 볼 적마다 저러다가 쓰러지는 게 아닌가 걱정됐다. 워낙에 가냘픈 데다 제때 뭘 챙겨 먹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