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 공사는 아래부터 서서히 위로 진격하고 있었다. 공사장 비계처럼 쇠파이프를 얽어 둘러놓은 비닐 가림막으로 가려진 곳들은 이미 쑥대밭이었다. 과연 이곳에 집들이 있었던가 싶게 시멘트도 벽돌도 널빤지도 잘근잘근 부숴 놓았다. 제 덩치보다 큰 집의 기둥을 쪼아 순식간에 주저앉혀 버리는 포클레인을 앞세운 이들은 윗동네 코앞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윗동네는 오래전에 전의를 상실했다. 그깟 포클레인쯤이야 하고 싸울 사람은 없어 보였다. 아주머니들이 파마를 하고 앉아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했을 샤넬미용실도, 아이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을 럭키슈퍼도, 언제나 철 지난 옷들을 빽빽하게 걸어놓았을 신생세탁소도 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가게 문 앞에도, 녹슨 대문 앞에도 하나같이 ‘공가’라는 딱지를 달고 있었다. 딱지..
다문화 공부방에서 만난 아이는 또래보다 몸집이 컸다. 아이는 늘 제 몸집과 다르게 앙증맞은 가방을 메고 와서 아이답지 않게 한갓지게 잘 챙겨두곤 했다. 야무지구나 싶었는데, 간혹 지나쳐서 사람들을 애먹였다. 한 번 싫다고 한 건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없었다. 좀처럼 웃지도,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는 아이가 입을 앙다물고 고개를 내두르면 모두들 고집불통이라고 혀를 끌끌 찼다. 아이는 어느 날 같은 학년 친구와 사소한 일로 옥신각신하다가 불쑥 말했다. “나는 3학년이 아니고 4학년이 맞아. 사실은 나는 언니야.” 아이의 표정은 몹시 억울해 보였다. 모두 아이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어쩌겠어. 베트남에서 온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한글을 잘 모르니 나이보다 아래 학년에 들어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
아마도 석탄을 실어 나르는 화물기차가 다니는 기찻길 옆 동네라 그랬는지 모른다. 골목길 흙이 시꺼멓던 것은. 해거름 녘까지 골목을 뛰어다니면서 노는 아이들 발에 파인 흙은 연탄처럼 까매서 마당에는 늘 검은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아이들이 아무리 밟고 다져 놓아도 비가 오면 골목은 이내 곤죽이 된 펄처럼 발이 쑥쑥 빠졌다. 그래도 아이들은 비만 그치면 진흙탕이 된 골목을 휘젓고 다녔다. 그 골목길 아이들은 대개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학교에서 못 본 아이들도 금방 한 패거리가 되어서 놀았다. 그 아이도 골목 모퉁이에서 여자 아이들끼리 고무줄놀이를 하다가 만났다. 곱슬한 머리를 바짝 묶어 올린 아이는 깡총한 치마를 입고 고무줄을 잘도 뛰어넘었다. 그 아이의 등은 낙타처럼 봉긋 솟아있었다. 골목길 아이들은 그..
아이들은 자신들이 사는 집을 꽃집이라고 불렀다. 왜 그리 부르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언뜻 생각해보면 예쁜 아이들을 꽃이라 할 수 있겠거니, 아이들 마음을 헤아리면 집은 집이되 아이들만 있는 특별한 집이라 이름을 붙였겠거니, 문패 대신 붙어 있는 간판 이름보다 낫겠거니 짐작만 하고 말았다. 아무튼 꽃집에 사는 아이들은 지켜봐 주는 부모 없이도 모두 무럭무럭 잘 자랐다. 제주도가 고향인 아이는 할머니를 만나러 가려고 4학년 때부터 꼬박꼬박 후원금과 용돈을 모았고, 마침내 꿈을 이뤘다. 예의 바르고 반듯했던 아이는 할머니가 제 앞으로 남겨주신 돈을 내놓지 않으려고 버티는 삼촌들과 끝끝내 싸워 이겨서 그 돈을 대학 등록금으로 썼다. 이따금 엄마가 찾아오던 아이는 늘 아버지를 보고 싶어 했는데, 스무 살에 찾아..
그곳은 고깃배가 드나드는 포구였다. 포구를 ‘개’라 했으니 그곳의 본래 이름은 ‘터진개’였다. 바닷가로 터져 있는 그 포구에 일본인들이 부려 놓은 고깃배까지 드나들면서 어시장이 들어섰다. 터진개 시장이라 불리던 어시장에는 앞바다에서 잡힌 고기들이 깨끗하게 씻어 놓은 돌판에 놓였다. 이른 아침부터 어시장은 싱싱한 생선을 사려는 이들로 북적였다. 생선 장수들은 솜씨 좋게 배를 갈라 내장을 빼낸 생선을 대팻밥 포장지에 둘둘 말아줬다. 까마득하게 오래전 얘기다. 쌀을 제 나라로 실어 나르던 일본 배가 포구를 떠나고, 고깃배도 점차 수가 줄어들면서 어시장은 자연스럽게 사라졌으리라. 고깃배도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도 없는 포구는 메워져 앞바다 작은 섬과 잇닿으면서 터진개 시장은 푸성귀와 없는 것 빼놓고는 다 있는 신..
스승의날 카네이션을 다느니 못 다느니 시끄러운 뉴스가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서 새삼 내 삶에서 만난 수많은 선생님들이 떠올랐다. 좋은 선생님이 많았다. 어떤 분은 전쟁터에 나가려면 반드시 총을 챙겨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고, 어떤 분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 하셨고,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날이 있으니 절망은 금물이라고 얘기해 주신 분도 계셨다. 내가 그나마 남 탓하지 않고 제 깜냥만큼 사는 건 훌륭한 선생님들 덕분일 텐데,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중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이다. 그는 화가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학교에 부임하자마자 1학년 담임을 맡은 그는 툭하면 아이들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아침부터 떠들어대는 아이들 앞에서 난감한 얼굴로 출석부를 교탁에 내리치다 속이 터져 울었고,..
그는 친절했다. 기차역에 마중을 나와 학교 가는 길 내내 도시의 지리와 지명을 설명했다. 그 도시의 토박이인 그는 자랑할 게 꽤 많았다. 세계에서 유일하다는 공원에 들렀던 유명 인사들의 이름도 기억했다. 그의 자랑은 학교에서도 이어졌다. 얼마 전 아이들과 1박2일로 다도 예절 실습을 했으며, 아이들을 이런저런 직업체험에 데리고 다닌다는 말에 참 세심한 학교구나 싶었다. 그의 말을 설렁설렁 들은 탓이었다. 강연을 끝내고 나오자 그는 아이들이 행여 소란스럽지는 않았냐고 걱정했다. 아이들이 모두 열심히 들었으며, 재치 있는 질문을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는 대답에 그는 안도했다. 그러고는 강연을 들은 아이들이 형편이 어려워 지원을 받는 아이들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제야 나는 아뿔싸, 그가 자랑하듯 말한 행사들이..
- 5월 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우리 때도 어른들한테 흔히 들은 말이었다. 우리 동네 할머니는 인사하지 않고 지나가는 철공소 집 아들을 보면서 이리 말했고, 성질 고약한 음악 선생님은 출석 부를 때 시킨 대로 소프라노 목소리로 대답하지 않는 애를 두고 이리 말했고, 버스 안에서 자리 양보하지 않는 여학생 뒤통수에 대고 낯 모르는 아주머니도 이리 말했다. 요즘 것들은…. 요즘 것들로 시작하는 말의 끝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어쨌든 요즘 것들은 예전 것들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는 모든 요즘 것들이었던 이들의 염려와 걱정에 요즘 것들이 저항하면서 진보한 것은 아닐까. 청소년들이 직접 만드는 신문이 있다고 해서 구독 신청을 해서 받아보니, 신문 제호가 떡하니 ‘요즘 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