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적 우리 동네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 일하는 아저씨가 여럿 있었다. 어른들이 ‘사우디에 갔다’는 말끝에 붙이는 형용사에는 대개 안쓰러움이 담겨있었다. 어른들의 오가는 말속에 ‘사우디’는 달걀을 도로 위에 깨트리면 지글지글 익어버리는 뜨거운 태양과 온종일 입안에서 서걱거리는 모래바람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그 나라 이름을 들을 때마다 모래바람을 뒤집어쓴 채 끝도 없이 이어지는 파이프 위에 듬성듬성 서 있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아무튼 뜨거운 사막에서 땀 흘린 이들은 집으로 돈을 부쳐서 모래바람은 집이 되고 텔레비전이 되고 냉장고가 되었다. 이제 아이들은 사우디아라비아라고 하면 석유와 잘 나가는 축구팀 하나쯤 사는 건 일도 아닌 거부를 떠올릴 테고, 어른들은 가물가물한 못 먹던 시절 얘..
꽤 오래전에 이발소를 담은 사진집을 샀더랬다. 여름이면 길가에 수건을 내다 말리고, 겨울이면 창문 틈으로 빼놓은 연탄난로 배기통으로 연기가 품어져 나올 것 같은 오래된 이발소 앞에 흰 가운을 입고 서 있는 이발사들은 모두 멋쩍어하고 있었다. 이발소를 하면서 닭집도 하는, 그래서 이발소 간판에 닭이 떡하니 그려져 있는 사진은 잊히지 않았다. 작가는 그 사진에 이리 글을 달아놓았다. 이발소보다 닭집이 잘되는 것 같더라고. 나는 카메라 하나 들고 시골 마을을 돌아다녔을 호기로운 젊은 작가를 떠올리며 부러워했다. 전주에 일 보러 갔다가 틈이 생겨 사진 전시회를 찾아갔다. 전시관은 담장과 담장이 이어진 좁은 골목에 깊숙하게 자리 잡은 지붕 낮은 집이었다. 페인트칠을 한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옹색하지만 어린아이들 ..
그가 불쑥 나타난 건 이주민 한글학교 공부방 마당에 낙엽이 굴러다니고, 마당 텃밭에 키운 채소가 첫서리를 맞아서 시들부들해진 늦가을이었다. 그는 아침 일찍부터 공부방에 나와 어린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그는 공부방에 들어오는 아이들과 인사를 할 적마다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알려줬다. “미화 수녀야. 미화 수녀라고 부르면 돼.” 안식년이라서 토요일마다 공부방 일을 돕기로 했다는 그는 안식년에 일하면 안식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말에 손뼉을 치면서 깔깔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낯섦이 저만치 물러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금방 그를 따랐다. 그는 투정 부리는 아이를 웃으면서 잘 달랬고, 장난감을 들이민 아이들하고는 아주 진지하게 놀아줬다. 간혹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에도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청년이 주춤주춤 내 옆으로 다가왔다. 15층에 사는 청년은 키가 큰 데다 덩치까지 있어서 옆으로 다가서는 것만으로도 움찔하게 된다. 청년은 전화번호 여러 개가 적힌 쪽지를 내게 내밀면서 말했다. “아줌마, 전화 좀 빌려주세요.” 청년은 내가 얼른 휴대폰을 내밀자 고개를 내저으면서 종이쪽지를 내 코앞에 바짝 갖다 댔다. 전화를 걸어달라는 거였다. 청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전화번호는 아빠라고 적혀 있었다. 청년은 아빠와 전화가 연결되자 큰소리로 물었다. “어디예요? 왜 안 와요?” 서른 살이 넘었을 청년은 예닐곱 살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호기심이 생기면 상대방이 무안하도록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엉뚱한 참견을 한다. 처음에는 단 둘이 엘리베이터에 오르면 슬그머니 겁이 나서 딸한테는 같이 ..
어쩌다 쌀국수를 먹을 때나 보는 고수가 밭에 졸졸 심어져 있었다. 한 평 남짓한 밭에 뿌리를 내린 고수는 새파랗게 잘 자라고 있었다. 그 옆에 다보록하게 자라고 있는 얼갈이배추 어린잎 같은 채소는 베트남 사람들이 즐겨 먹는 라우 무이 뚜이라고 했다. 집 뒤꼍 푸서리에 일군 손바닥만 한 밭을 보여준 아이는 좁은 두둑을 사분사분 걸었다. 아이는 네 살짜리 동생을 보느라 토요일마다 나오는 공부방을 빠졌다. 어쩌면 내내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아이는 혼자 귀화시험 공부를 하고 있었다. 벽에 바짝 붙여 놓은 매트리스 위에는 귀화시험 대비 참고서가 펼쳐져 있었다. 베트남어와 한국어가 섞여 있는 참고서에는 여기저기 쪽지가 붙여져 있고, 밑줄도 그어져 있었다. 정말 열심히 공부하나 보다고 했더니 아이는 고개를..
우연히 식당에서 만난 후배의 조카는 말간 얼굴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는 열세 살이지만, 몸이 더디게 자라고 있었다. 6학년 교실에서 아이의 친구들이 동생처럼 귀여워한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안도했다. 친구들이 따돌리지 않고 어울리니 참 다행이구나. 가족들한테도 친구들에게도 사랑을 받아 아이가 저리 밝구나. 아이가 이제 중학교에 들어가야 한다고 후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을 때도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하고 잘 지냈으니 중학교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제 엄마 옆에 붙어 앉아 맛있게 밥을 먹으면서 간혹 낯선 이와 눈을 마주치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는 아이를 보면서 속도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열세 살은 마치 폭풍이 휘몰아치듯 내달..
종로 3가 지하철역에서 낙원상가로 가는 길은 이른 아침부터 부산하다. 식당들은 문 열 채비를 하고 있고, 땅콩과자를 파는 포장마차도 벌써 장사를 시작했다. 짐을 나르는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오가는 틈으로 노인들이 바삐 걸어 다녔다. 옛날 영화 속에서나 봤을 법한 흰 양복에 흔히 백구두라 불리는 구두까지 갖춰 신은 노인을 마주치고는 문득 둘러보니 낙원상가 앞은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았다. 허름한 4층 건물에는 1980년대에 흔히 있었던 의상실, 기원, 도장 파는 집이 있었고, 식당의 낡은 간판들은 언제부터 매달려 있었는지 감감해 보였다. 그 길모퉁이를 돌아 낙원상가 4층으로 올라가면 허리우드 실버극장이 있다. 영화 첫 상영 시간에 맞추려고 종종걸음쳤는데, 이미 10분이나 늦어버려 그냥 갈까 말까 망설이면서 ..
제주시 어느 동네 오래된 집이 복닥복닥 모여 있는 좁은 골목길에는 작은 책방이 하나 있다. 책방 주인은 처마 낮은 슬레이트 지붕 위에 눌어붙은 낡은 식당 간판을 그대로 둔 채 그 옆에 책방 간판을 태연하게 걸어놓았다. 메뉴판과 숫자 큰 달력이 매달려 있었을 벽에 책장이 세워져 있는 데다 곰탕이 끓어오르고, 생선이 구워지고, 나물이 무쳐졌을 부뚜막에는 책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으니 이곳은 식당이 아니라 책방이 맞다. 오래전에는 식당이었던 곳이 책방이 되고, 그곳에서는 노래를 부르다가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되었다는 세 사람의 음악 공연이 열렸다. 책이 진열되어 있던 큰 테이블을 치운 뒤 늘어놓은 의자에 옹기종기 앉은 스무 명 남짓 되는 사람들 앞에 기타를 들고나와 선 이들은 노래처럼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