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어뜨린다, 존치한다 말이 많던 세운상가는 여전히 건재했다. 겉으로는 그랬다. 세월에 깎이고, 파이고, 무너지는 것들을 쇠기둥으로 떠받치며 보수 중이었지만, 그래도 멀쩡해 보였다. 1층 가전제품을 꽉꽉 채워놓은 가게들도 문을 열었으며, 2, 3층에는 이런저런 전자기기를 파는 작은 가게가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가게들 틈바구니에서 몇십 년을 버틴 담뱃가게도 그대로다. 이곳은 그대로인데, 변한 건 세상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변하는 세상에 순응했다. 사람들은 전자제품 하나 살 요량으로 발품 팔면서 세운상가를 찾지 않는다. 카세트 레코더 하나 사겠다고 기차 타고 전철 타고 이곳에 와서 온종일 이 가게 저 가게 기웃거리다가 멀건 설렁탕으로 허기를 채우고는 해 질 녘에 기껏 비디오테이프 몇 개 사서 집으로 ..
그곳에 그는 없었다. 그는 그곳에 당당히 있어야 했다. 그의 작품이 상을 받아서 북 콘서트가 열린 자리였으니까. 7년 전 그를 처음 봤던 곳도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상식 자리였다. 오래되어 언저리만 남은 희미한 기억 속에서 스물다섯 살의 그는 쑥스러워하며 배시시 웃는 모습이다. 취업을 하지 못해 글을 쓰기 시작했고, 첫 작품으로 상을 탄 그는 담담했다. 첫 발걸음을 뗀 그의 모습은 금방 잊혔다. 그가 그 뒤로 세상에 내놓은 작품은 얼굴 붉히는 볼 빨간 이십대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폭력 앞에 무참히 짓밟히고 깊은 절망에 빠진 소년의 이야기를 밑바닥까지 끌고 내려간 작품에서 그는 분노한 소년이었고, 평생 농사를 짓다가 상경해서 대학교 청소노동자가 된 노인의 이야기를 넉살 좋게 풀어 놓은 작품 속에서 ..
그는 일찌감치 깨달았다고 했다. 사는 게 만만하지 않구나. 삶의 무게는 오토바이 뒤꽁무니에 매달고 밤새 온 도시를 질주한다고 해도 닳아 없어지지 않으며, 한 달 내내 수 백 개의 햄버거를 만들어도 감당하기 어렵구나. 열일곱 살에 집을 나와 2년을 혼자 버텼다는 그는 그래도 자신은 운이 좋았다고 했다. 용케 들어간 대학이 수도권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수월하게 졸업할 수 있었고, 단박에 짱짱한 중소기업에 취직도 했으니…. 정말 간절히 바라므로 우주가 도와준 것이었을까? 한 달 가까이 야근을 하고, 지난밤에는 철야까지 했다는 그의 퀭한 눈을 보면 그쪽보다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만고의 진리 쪽에 가깝다. 그런데도 그는 자꾸 자신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방황하는 애들을 보면 내가 어떻게 살았는..
- 2월 1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한때 그곳은 휴일이면 관광버스가 줄지어 드나들던 이름난 온천이었다. 그곳에서 맨 먼저 생겼다는 목욕탕의 이름은 그냥 온천탕이었다. 온천탕은 사시사철 몰려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손가락 끝이 쭈글쭈글해질 때까지 탕 안에 들어가 앉아 있다가 나온 사람들은 목욕탕 안마당에 있는 수돗가에서 유황 냄새나는 물을 물통에 받느라 줄을 서곤 했다. 그 동네에서 나고 자란 할머니는 으리으리한 목욕탕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서도 허름한 온천탕으로 다녔다. 할머니는 늘 설을 쇠러 온 손녀들한테 솜을 두껍게 넣고 누빈 버선을 신겨 온천탕에 데려갔다. 평생 농사를 지은 할머니의 손힘은 어찌나 억센지 손녀들의 등짝을 시뻘겋도록 밀고서도 끄떡없었다. 목욕을 다 하고 나오면 할머니는 유황 냄새나는 약수를..
남쪽 끄트머리에서 보내온 짤막한 메일을 받고 그날이 떠올랐다. 2015년 늦가을 어느 날이었다. 하늘은 푸르렀고, 바람은 푸근했다. 그래도 천장이 높은 학교 강당은 썰렁해서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한 학년이 모두 나왔다고 하니 200여명이 넘었다. 그들은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자마자 하나같이 지쳐 있었다. 지루하고 시시할 게 뻔한 시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학생들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강연이고 뭐고 슬그머니 도망가고 싶었다. 그때 나타난 학생이었다. 사회를 맡았다고 인사하면서 밝게 웃던 모습. 책을 낭독하면서 어색한 연기를 태연하게 잘 해내던 모습. 메일을 보낸 학생이 선명하게 떠올랐지만, 곧 안부 인사는 잊혔다. 그런데 그 학생은 까맣게 잊히지 않을 만큼 메일을 보냈다. 어느 날은 심야자습반에 ..
낯선 도시는 황량했다. 뫼비우스 띠처럼 길게 이어진 건물이 불쑥 솟은 도시는 건물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에워싼 길을 돌고 또 돌아도, 블랙리스트 명단을 만든 이들을 구속하라고 소리쳐도, 건물은 뭣 하나 토해내지 않았다. 드나드는 이 없이 해가 지고 건물에는 불이 켜졌다. 마침 그날은 보름 전날이었다. 살짝 이지러진 달은 휘영청 밝았고, 맨땅을 무대로 삼은 이들의 노래는 아름다웠다. 노래를 들으며 울적했다. 멋대로 예술가를 솎아낸 이들의 뻔뻔함을 보면서 한 일도 없이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들어간 나의 부끄러움과 마주해야 했다. 나 또한 이지러진 세상의 일부가 아닌가, 나는 대체 뭘 했는가 자괴감이 들 무렵 그가 나섰다. 맨발로 차가운 땅을 딛고 선 그는 음악이 나오자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어깨를 젖히고..
어릴 적 내 영웅은 짱가, 마징가, 태권V 따위였다. 이들 중 유일하게 국내에서 자체 개발한 태권V의 실체는 구체적이었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 눈에서 뿜어져 나온 레이저빔이 63빌딩에 반사되어 국회의사당을 비추면 둥근 돔이 열리면서 그가 등장할 거라고 했다. 꽤 오랫동안 63빌딩을 보며 발차기로 지구를 구할 거대한 존재를 떠올렸다. 허무맹랑하지만, 가슴 뿌듯한 이 판타지가 깨진 것은 우리 동네에 59층 아파트가 들어선 뒤였다. 배추가 새파랗게 자라고, 호박 넝쿨이 뻗치던 곳에 어느 날 우뚝 솟은 아파트의 위용에 익숙해지면서부터 63빌딩을 봐도 경이롭지 않았다. 그리고 정의를 수호할 존재에 대해서도 잊었다. 따지고 보면 고층 아파트 탓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 더는 꿈꾸지 않게 되면서 판타지 세상은 멀어졌다..
벚꽃 잎이 난분분히 흩날리고 있다. 화사한 봄빛을 터트린 벚나무 아래에 모여 선 아이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눈부시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아이들과 함께 다소곳하게 서 있는 앳된 선생님은 아이들만큼이나 순한 눈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마지막 봄이 그렇게 사진 속에 있었다. 정유년 새해 첫날, 기억교실에서는 세월호 유가족 몇이 반별로 찍은 단체 사진을 벽에 걸고 있었다. 의자에 올라선 아버지의 못질은 서툴렀고, 의자를 꼭 잡고 있는 어머니의 눈매는 매서웠다. 못이 단단히 박혔는지, 한쪽으로 기울지나 않았는지 한참 공을 들인 뒤에야 사진 하나가 걸렸다. 아이에게 떡국을 끓여줄 수도, 새해 덕담을 해줄 수도 없는 부모들은 사진을 거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도 되는 양 온 힘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