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왜 이리도 더디 오는지, 아마 급작스레 추워진 날씨 탓이겠지만, 그래도 봄은 어김없이 이승을 따뜻하게 데울 것이다. 일부러 꽃구경을 갈 여유는 없지만, 아내가 끓여준 백련차에서 깊은 향을 느낀다. 그러고 보니, 수년 전 강진 백련사 선방에 앉아 백련차를 마시던 기억이 삼삼하다. 연꽃이 한창일 때 따서 급속냉동을 시키면, 그 향이 보존된다고 하더라. 식구들은 서울 은평구에 있는 살림의료협동조합에 가입했다. 살림의원에 가입차 방문했다가 만화책 한 권을 발견했다. 여기서 주호민이 그린 이승편을 읽었다. 철거 예정지역으로 지정된 한 산동네 이야기다. 낡아빠진 오락실을 운영하며 혼자 살던 장학봉 노인이 사망 일주일 만에 이웃에 의해 발견되는데, 노인이 저승차사와 나눈 이야기가 여운이 남는다. 저승차사가 나타..
김별아 | 소설가 ywba69@hanmail.net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웬만한 가정에서 거실의 주인은 다름 아닌 텔레비전이다. 모두의 눈길이 닿는 가장 좋은 위치에 떡하니 자리 잡은 채 식구들과 생활을 함께한다. 어떤 이들은 텔레비전을 거의 숭배하다시피 모신다. 귀가하자마자 그를 찾고, 그의 매력에 홀려 온종일 쳐다보고, 시시때때로 더 큰 화면에 고화질의 신품으로 개비한다. 요즘은 유사한 기능을 하는 가지각색의 기기들이 생겨나 손바닥 안에 넣어가지고 다니며 언제 어디서나 그의 일거일동을 다시 보기도 한다. 이처럼 일상을 파고든 텔레비전이 미치는 영향력과 파급력이 막강하다 보니 웃지 못할 일들이 왕왕 생긴다. 어쩌다 뉴스 배경으로 깔리는 거리 스케치에 무표정한 행인으로 등장하거나 밥 먹으러 간 식당에서..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엔 오늘날처럼 이 정도로 취업이 어렵진 않았다. 전공과의 불화로 어서 학교를 떠나 출근이란 것을 하고 싶었다. 양복을 입고 사회에 편입하는 것도 너끈히 사는 한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엉거주춤하게 캠퍼스와 작별할 무렵, 내심 소박하게 생각해 본 게 있었다. 앞으로 이렇게 직장생활을 하면 어떨까? 취직을 하면 그래도 책상은 하나 생길 터이다. 그 앞으로 손님이 가끔 찾아올 것이다. 그럴 때 맨숭맨숭하게 있을 게 아니다. 둘 사이엔 뭔가 있어야 한다. 하필이면 왜 그런 유치한 품목을 선정했는지는 모르겠다. 세 번째 서랍 한구석에 땅콩을 수북하게 준비한다. 누가 찾아올 때 그 땅콩을 함께 먹으면서 고소한 이야기를 나누자. 그런 퍽 희한한 생각을 했었다. 또 하..
김별아 | 소설가 청맹과니 어린 날엔 몰랐다. 부모도 자식으로 인해, 선생도 학생 때문에 상처받을 수 있음을. 강의가 시작되자마자(혹은 시작되기도 전에) 졸다 못해 아예 잠드는 대학생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면 일희일비하거나 흥야항야하지 않기를 매양 다짐함에도 어쩔 수 없이 받은 생채기로 쓰라리다. 처음엔 젊은이들의 밤잠이 어찌 그리 부족한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했다. 그들의 가수면 상태는 아침 1교시든 오후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든 교양필수 특강이든 매한가지였다. 다음엔 자기반성으로 내 이야기가 그리도 시시하고 재미없나 고민하며 점검했다. 멀티미디어 세대는 눈부터 사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개 발에 편자인 프레젠테이션 자료까지 멋들어지게 만들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내용을 바꾸고 형식을 개비해도 애초..
최용혁 | 서천군농민회 교육부장 3년 전까지만 해도 보행이앙기를 끌고 쫀득쫀득해진 무논을 철퍽철퍽 걸어다니며 모를 심었습니다. 허벅지까지 꽉 끼는 물장화를 신고 하루 종일 1만여㎡의 논에 모를 심고 나면 온몸이 한여름 엿가락처럼 흐물흐물해지지만, 네 줄씩 착착 심어지면서 들판이 파랗게 채워지는 것을 가까이에서 보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할 만한 일이었습니다만, 힘들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몸의 상태에 따라서가 아니라 승용이앙기가 점점 눈에 많이 띄면서부터였습니다. 더구나 보행이앙기를 끌고 서너번 왔다갔다하는 사이에 옆 논에서 승용이앙기로 논 한 자리를 다 심고 “어이! 이리 와서 술 한잔 먹고 하소” 하면, 이건 참, 술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부르는데’ 갈 수도,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일감의 정도와..
한상봉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서울을 떠난 지 10여년 만에 다시 돌아온 서울에서 실종된 것은 ‘삶’이었다. 일상은 계속되었으나 복잡한 관계망 때문에 ‘나’에 대해 주목하지 못하고, 매듭 없는 끈처럼 정리되지 않은 채 지루한 하루 이틀이 쌓여갔다. 가끔 반짝이는 희열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제와 같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강박처럼 나를 자주 슬럼프에 빠지게 했다. 자고로 사람은 추운 겨울날 가슴에 넣은 손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어야 ‘생존’을 확인하듯이, 몸을 움직여 제 몸에서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땀내를 맡으면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하다못해 좀처럼 앓아눕지도 못하는 내 건강을 탓하기도 했다. ‘이제 그만!’이라는 소리가 콘크리트 바닥에서 차오른다. 어제는 밤 늦은 회식을 마치고 집에..
김별아 | 소설가 내 고향은 동해에 잇닿은 변방의 작은 도시다. 황제의 야망보다는 제후의 평강을 택한 시조를 따라 천년 동안 삶터를 지킨 토박이 집안에서 수성(守城)의 미덕을 배우며 자랐다. 하지만 어린 나를 쏘삭인 것은 타지 출신들이 ‘텃세’라고 부르는 가득권의 안정감보다 ‘탈출’에 대한 의지였다. 한마디로 나는 답답하고 지루했다. 학기가 바뀔 때마다 같은 반에 두어 명씩은 돌림자를 쓰는 방계 친족이 있었고, 성씨가 달라도 따지고 들면 사돈에 팔촌쯤 되는 친구가 수두룩했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는 바람에 들썽거리던 시절, 아무리 정처 없이 헤매려도 아버지 친구, 엄마 친구, 동생의 친구와 이웃 아줌마 아저씨까지 거듭 부딪치는 좁디좁은 ‘시내’를 견디기 힘들었다. 항상 감시당하는 기분이었기에 한시..
이갑수 | 도서출판 궁리 대표 점심시간을 끼고 인왕산에 올랐다. 새해가 오면 산 아래 동네에는 바뀌는 것도 많다. 달력이 바뀌고 사람들의 나이가 바뀐다. 방이나 벽지를 바꾸고 싶은 이도 많을 것이다. 여기서 한눈에 보이는 청와대의 얼굴도 잠시 바뀐다. 그러나 인왕산은 그저 인왕산일 뿐 그랬거나 말았거나 그제 내린 눈을 품에 안고 묵묵히 서 있었다. 오랜만에 산을 오르자니 그냥 사무실에서라면 만나지 못했을 생각들이 멀리서 찾아왔다. 고향, 인생, 죽음 그리고 책. 이에 관해 신년에 걸맞은 궁리를 이리저리 해 보았다. 그런 좀 무거운 주제가 끊길 무렵이면 산을 구성하고 있는 풀, 돌, 나무 등 더욱 묵직한 것에 대한 생각을 밟아나갔다. 그리고 벌레와 곤충의 안부를 찾아 숲으로 궁금한 눈길을 던지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