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정치 현상을 묘사하는 말에는 민주적 가치와 충돌하거나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는 표현들이 가끔 있다. ‘독대’라는 용어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제는 사라질 법도 한데 여전히 자주 접하게 된다. 최근에는 보수 언론과 진보 언론 가릴 것 없이 “정 총리, 이 대통령과 독대”라는 표현이 모든 매체의 표제어로 사용되었다. 제1야당인 민주당 원내대표도 국회 교섭단체 연설을 통해 “정운찬 총리가 이명박 대통령을 독대해 청와대 참모진의 인적 쇄신을 건의하려 했지만 청와대 참모진이 총리의 대통령 독대를 막았(다)”며 독대의 허용을 주장하기도 했다. 진보정당들도 다르지 않다. 이들 사이에서도 누군가가 당대표와 따로 만나는 것을 독대한다고 표현하는 사람이 많다. 독대란 과거 왕조 시대에 사용되었던 용어로, ‘..
한국 정치가 깊은 악순환의 구조에 빠진 게 아닌가 싶다. 집권당과 반정부연합 사이, 진보와 보수 사이에 갈등과 적대는 격렬한데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는 점점 줄어드는 현상이 그것이다. 이런 구조에서 가장 피해를 보고 있는 정치세력은 진보파다. 정치가 이성적 기반 없이 무작정 양극화로 치달을 때 힘이 약한 진보정당의 후보들은 선택의 범위에서 쉽게 제외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악순환 구조를 만드는 데 진보파 역시 기여한 측면이 있어 보인다. 사태를 보수나 집권세력 탓으로 단순화하고, 즉자적으로 화만 내고 내용 없이 주장만 앞서다보니 비판적 판단을 가진 유권자조차 피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정치운동단체인 ‘진보의 합창’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2011.04.02. | 경향신문 DB ..
인간 사회의 필요 때문에 정치가 만들어졌지만, 그러나 정치를 이해하는 인간의 능력에는 불가피한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또 정치 현실을 경험할수록 더욱 그렇게 된다. 이번 지방선거 결과를 지켜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수많은 여론조사의 예측을 크게 벗어난 개표방송 앞에서 필자는, 수천만의 유권자가 분출해낸 정치적 열망을 경이롭게 바라볼 따름이었다. 당황하는 한나라당의 모습이든 환호하는 민주당의 반응이든 ‘북풍’이 어떻고 ‘노풍’이 있었다 없었다 하는 해설들 모두 지극히 사소한 일로 보였다. 민주주의는 정치적 결과의 불확정성을 최대의 특징으로 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정치제도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을 실감하게 된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진보의 가치를 정치의 방법으로 실천해보고자 했..
1980년대 대학을 다닌 필자는 학부 4년을 공부 외의 일로 소진한 뒤 사실상 대학원에 가서야 제대로 수업을 들었다. 정치사상사 과목 첫 시간의 주제는 정치학이라는 학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동서양의 역사와 고전을 소재로 해서 다양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학문의 출발을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것에서 찾는 소크라테스의 테마가 오랫동안 좋은 자극이 되었다. 그런데 그 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일이란 단순히 학문의 출발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실력과 깊이를 보여주는 척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식의 제한성을 인정하고 과도한 자기 확신을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신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확실한 것은, 모든 걸 다 알 수 없고 또 그런 채..
이번 지방선거를 관찰하러 온 외국인 정치학자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주요 선거 이슈는 무엇인가?” 세종시, 4대강, 반정부 선거연합 등을 열거했다. 논리적으로는 사회 전체를 찬성과 반대로 양분하는 ‘최대 동원의 정치’를 불러올 만한 이슈들이다. 격렬한 갈등이 이어지고 그에 따라 선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투표 참여 의지 역시 고조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그래서 투표율이 얼마나 높아질 것으로 예상하느냐?”는 질문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 서울 마포구의 한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투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 경향신문DB 평등한 투표의 권리가 정치공동체 전체의 정당한 결정으로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선거의 민주성’을 말할 수 있는 최소조건이라고 할 때, 일정 정도 이상의 투표율만큼 중요한 것은..
누군가 필자에게 왜 민주주의라는 가치 내지 이념을 좋아하는지를 묻는다면, 무엇보다도 그것이 평등의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평등의 원리가 아니라면 민주주의를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권능에 공동체의 운명을 맡길 수 있는 정치 체계’라고 정의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또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 비범한 일을 해내는’ 민주적 성취에 경탄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갖는 데 있어서 재산, 교육, 태생, 신념 등과 같은 자격조건을 따지지 않는 정치체제는 민주주의가 유일하며, 공적 이슈를 둘러싼 논의와 결정 과정에서 일정 연령 이상의 구성원 모두 평등한 권리를 향유할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상상은 오로지 민주주의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필자의 이런 생각이 그리 넓게 받아들여지는..
일년 전쯤 어느 저녁식사 모임에서 정부 산하단체 기관장을 만났다. 지난 정부에서 임명된 대표적인 운동권 인사였는데, 이명박 정부하에서 해임될 가능성을 걱정했다. 그러면서 같이 자리한 사람들에게 이 정부의 요직을 맡고 있는 사람을 알면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지금의 자리는 국가적으로 너무 중요하고 자신이 그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므로 로비를 좀 해서라도 역할을 계속해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특별히 추천하는 사람이 없자 그때부터 그는 이 정부의 반민주성과 무도함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면서 진보니 개혁이니 할 것 없이 모두가 연대해서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안 그러면 자기 같은 사람들은 다 쫓겨난다는 것이다. 같이 있던 한 국립대 교수는 이 정부를 파시스트 정부라고 규정하면서, 더 ..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했고 지금은 평화운동을 하고 있는 대학 동기를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그는 우리 사회 진보파의 언어가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때로는 폭력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는 말을 했다. 그러다보니 진보적 매체나 논의의 장에 더 이상 참여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게 되더란다. 미국 진보파들 사이에서 정신적 지주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사울 알린스키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1930년대 시카고에서 빈민운동을 주도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진보적 활동가들을 교육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가 교육했던 주제 가운데 하나는, 말의 공격성 혹은 상대에게 모욕을 주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누군가를 향해 ‘돼지’나 ‘파시스트’라고 인격적으로 비난하는 활동 방식은, 듣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