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층의 정치 무관심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평소 정치에 참여하는 비율은 물론이고, 가장 소극적인 정치참여인 투표에서도 20대의 무관심은 두드러졌다. 대통령 선거를 포함한 거의 모든 선거에서 20대의 투표율이 가장 낮았으니 말이다. 원래 선거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 줄 사람을 뽑는 일이기도 하니, 20대의 낮은 투표율은 그들의 삶을 어렵게 만든 한 요인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투표 불참을 이렇게 변명하곤 했다. “바빠서 못했다.” “그놈이 그놈이다.” “누굴 뽑아도 바뀌는 게 없다.” “청년 후보가 없고 다 나이든 후보뿐이다.” 그러다 보니 조성주 같은, 청년 문제에 관심이 많은 이가 국회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물론 도덕성과 능력이 부족한 보수후보가 이 나라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이 현상이 극복된..
신재민씨는 2013년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2014년부터 공무원 일을 시작해 기획재정부(이하 기재부)에서 근무하다 2018년 7월 퇴사한다. 그로부터 4개월여가 지난 12월30일, 그는 자신이 왜 기재부를 그만뒀는지에 관한 장문의 글과 영상을 올렸다. 그가 말한 이유는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관료사회가 그대로이기 때문이었는데, 그 증거로 신씨는 두 가지 사건을 언급했다. 정부가 민간기업인 KT&G의 사장 교체에 개입했다는 게 그 하나고, 정부가 돈이 충분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빚을 갚기는커녕 추가로 빚을 지려고 했던 사건이 또 하나였다. 특히 2017년 말 벌어진 두 번째 사건은 국민경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빚이 1조원 추가될 때마다 국가가 그에 상응하는 이자 200억원을 매년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
내가 사는 천안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려면 남천안 IC를 타야 한다. 그때마다 천안야구장이 눈에 들어온다. 애써 안 보려고 해봤자 소용이 없다. 부지는 넓은데 이용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보니 금방 눈에 띈다. 비라도 내리면 운동장 곳곳에 작은 웅덩이가 생긴다. 처음 천안야구장을 봤을 땐 건물을 지으려고 땅을 다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완공된 야구장이라고 해서 기절할 뻔했다. 천안지역에도 야구동우회가 170여개나 되다 보니 운동장이 모자란 편인데도, 천안야구장을 이용하는 팀이 거의 없다시피한 이유다. 이 야구장을 짓는 데 든 비용은, 놀라지 마시라, 무려 780억원이다. 이 정도면 프로야구팀 경기장을 지을 수도 있는 돈. 아니 잔디는커녕 누런 흙에 줄만 그어 놓은 야구장에 무슨 돈이 그렇게 들었을까? ..
토요일이었던 지난 10월27일, 서울 혜화역에 남성들이 집결했다. ‘당신의 가족과 당신의 삶을 지키기 위하여’(이하 당당위)가 주최한 이 모임은 소위 곰탕집 성추행 판결을 규탄하기 위해 기획됐다. 곰탕집에서 일어난 성추행 가해자에게 징역 6월의 실형을 선고된 것에 항의하는 차원으로, 여성의 말만 듣고 유죄판결을 내린 이 판결이 남성들의 삶에 위협이 된다는 게 당당위의 주장이었다. 실제로 곰탕집 가해자의 부인이 남편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을 때, 인터넷은 이에 동조하는 남성들의 글로 도배됐다. 수많은 남성들이 ‘이러다간 무서워서 밖에도 못 나가겠다’며 울분을 터뜨렸는데, 이는 청와대 청원으로 이어져 31만명의 동의를 받기까지 했다. 사정이 이렇다면 당당위의 집회는 전국에서 몰려든 남성들로 미어터져야..
폐쇄회로(CC) TV 속의 남성이 여성 쪽으로 걸어간다. 남성이 지나가자마자 여성은 남성을 불러 세우고 격하게 항의한다. 그 남성이 자기 엉덩이를 만졌다는 것이다. 소위 ‘곰탕집 성추행 사건’이다. 이 사건이 화제가 된 것은 해당 남성-A씨-의 아내가 인터넷에 글을 올린 뒤였다. 그 글에 따르면 A씨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며, 높은 분을 모시는 자리여서 성추행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해당 여성, 즉 피해자가 사건 직후 합의금 1000만원을 요구했다는 것도 수상쩍다. 그럼에도 판사가 피해자의 말만 믿고 징역 6개월을 선고했으니 억울하다는 것이다. 수많은 남성들이 이런 판결을 내린 판사를, 그리고 피해자를 욕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의 말처럼 해당 CCTV로는 성추행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
“두려워 마십시오. 저희 의사들이 당신을 돕고 당신의 아이를 지킬 것입니다.” 2009년 12월, 프로라이트 의사회가 출범했다.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낙태 시술 근절을 목표로 만들어진 이 단체는 이듬해 2월, 불법 낙태 수술을 하는 병원 3곳과 의사 8명을 검찰에 고발한다. 산부인과 의사가 동료의사를 고발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었지만, 그로 인한 파장은 컸다. 그간 암암리에 낙태를 해오던 산부인과들이 시술을 중단한 것이다. 낙태를 하러 온 여성들은 “안 한다”는 말을 듣고 쓸쓸히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낙태를 포기할 리는 만무했다. 미혼모가 되는 게 두려워서, 원하지 않는 성관계로 인해 임신이 됐을 때, 한 명을 더 낳아 키우는 게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 기혼자 등등 다들 낙태를 해야 할 ..
가정 1. “이건 기생충이 맞습니다.” 내 말에 A는 당황해했다. “선생님, 다시 한번만 봐주시면 안될까요? 아무리 봐도 이건…” 난 A의 말을 잘랐다. “이것 봐요. 기생충은 제가 님보다 더 잘 알잖아요? 제가 맞다면 맞는 겁니다.” A는 알았다고 하며 내 연구실을 나갔다. 그로부터 5년 뒤, 난 학술지에서 ‘기생충과 구별해야 할 음식물들’이란 기고문을 봤다. 소화가 잘 안 되는 식물의 줄기가 대변으로 나올 경우 기생충과 헷갈릴 수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내가 놀란 건 사진에 나온 콩나물이 A가 내게 가져온 물체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렵사리 알아본 결과 내 진단이 A에게 미친 영향은 상상 이상이었다. 기생충에 감염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회사는 A를 해고했다. 재취업을 하려고 해도 기생충 감염 전력은 ..
‘1, 다른 것이 아니라 오로지. 2, 그 이상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다만’이라는 부사에 대한 설명이다.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자주 쓰는 단어도 아니고, 뜻을 보니까 무슨 말인지 더 헷갈리는데, 그럼에도 우리가 이 단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다만’이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 두 문장을 이어주는 데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강씨(32·남)는 올해 1월7일 오전 2시20분께 제주 시내 한 마트 맞은편 도로에서 택시를 기다리던 피해자 A씨(58·여)에게 다가가 갑자기 욕설을 하며 주먹을 휘두른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피해자의 옷과 머리채를 잡아 길바닥에 넘어뜨린 후에도 얼굴과 몸을 수차례 주먹으로 치고 발로 걷어차 코뼈를 부러뜨린 것으로 조사됐다.’ 강씨는 피해자인 A씨와 전혀 알지 못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