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녁은 밤과 새벽을 거쳐 아침으로 연결된다. 그게 순서다. 4월 다음에는 당연히 5월이다. 요즘 역주행하는 노래들이 있다는데 여름의 입구에서 겨울로 거꾸로 달리는 날씨인가. 봉평에 일이 있어 갔다가 뜻밖의 눈 소식을 들었다. 그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대관령으로 달려 능경봉에 올랐다. 눈이 소복하게 거짓말처럼 쌓여 있었다. 눈도 나무도 사람도 이 예기치 않은 사태에 어리둥절해하는 것 같았다. 천하의 계절에 춘하추동이 있듯 꽃들에게도 피는 차례가 있다. 최근 그 개화 순서가 많이 변했다는 소리가 들린다. 때를 맞추지 못한 불시화가 있는가 하면 꽃들이 일거에 피었다가 일시에 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꽃대궐의 계단 한 귀퉁이가 허물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기후변화의 한 전조가 이리도 생생하게 들이닥치는 ..

하늘이 저 위에 있는 건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 몰려올 때 쳐다보라는 비상구. 의례적인 인사가 아닐지라도 그래도 죄송하다는 말은 입 가까이에 두고 살았다. 잘못은 옛날의 일이고, 그 잘못이 생각나는 건 오늘의 일이다. 갈수록 뻔뻔해지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와중에 죄송스럽다는 그 단어를 또 이렇게 만나고 보니, 내 오합지졸의 생각들이 일거에 난처한 지경으로 머쓱해진다. “니체를 읽으면 수운이 보이고 수운을 보면 형편없는 나의 몰골이 떠오른다. 비록 보잘것없이 살고 있는 것이 죄송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수운이 예전에 밟은 땅을 지금 딛고 산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황홀하게 자랑스럽다.”(김인환 산문, ‘동학과 더불어’) 동학은 늘 마음 한구석에 공부의 주제로 삼은 바가 있지만 이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고전..

내장산 국립공원의 남창계곡을 헤맨다. 희귀한 노랑붓꽃을 찾아나선 길. 주야로 흘러가는 물에도 이 계곡이 파이지 않는 건 물가의 단단한 돌들 덕분이다. 겨우 어느 바위틈에서 노랑붓꽃을 만났다. 주어진 시간을 소화하고 또 어디로 떠나는 다소 추레한 모습이었다. 비바람, 벌레, 햇빛에 짓이겨진 꽃잎들. 그렇게 아름답게 허물어지는 꽃과 헤어져 투숙한 허름한 모텔. 초승달이 외롭게 건너가는 동네에서 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EBS ‘세계의 명화’의 를 놓칠 수 없었다. 제목의 절반이 꽃이 아닌가. 이 영화는 뒷모습이 주인공이다. 아예 뒷모습으로만 슬쩍 처리되는 인물도 있다. 가슴을 파고드는 주제곡이 흐를 때면 치파오를 입은 장만옥과 등이 아담한 양조위의 뒷모습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이목구비만으로 사람의 얼굴은 서로..

서거정의 서문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네이버 열린연단의 한 에세이에서 만난 대목이다. “하늘과 땅이 생겨나자 해와 달과 별이 하늘에 총총하게 들어서고, 땅에 산과 강과 바다가 나타나, 이것이 천지의 문장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인이 나타나 하늘의 괘를 긋고 문자를 만들자, 그에 따라 사람이 시서예악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천지의 기본적인 형체에서 글, 문(文)이 생겼다는 것이다.”(김우창, 세상의 무늬) 파주 출판단지를 굽어보는 심학산은 그 이름에서 깊은 맛을 풍긴다. 지하로 깊숙이 내통하는 저 산과 창밖 가로수 사이로 차례차례 배열되는 게 있다. 숨어 있는 몇 기의 무덤, 사하촌처럼 즐비한 식당 그리고 전원주택과 출판사.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세상의 무늬를 이룬다. 봄인가 했는데 벌써 봄은 가고 ..

봄이 왔다. 노랗고 붉고 하얗게. 저 꽃들 속에서 올봄 특히 찾는 게 있었다. 남산으로 나서면서 혹 산수유를 볼 수 있을까, 기대를 했다. 세상에 참 흔한 게 산수유이지만 막상 찾으려니 눈앞에 없기도 하다. 둘레길에 우세한 건 벚꽃과 개나리. 없는 것을 찾으며 두리번거리는 나에게 핀잔이라도 주려는 듯 죽은 나무가 찾아왔다. 남산골 한옥마을로 내려가는 골짜기쯤에 탈색된 나무가 있다. 모두가 활짝 피어나는 마당에 푸르름을 상징하는 일군의 대나무였다. 작년에 퍽 희한한 일 하나를 겪으면서 우연히 집어 든 에 많은 위로를 받았다. 꼼꼼히 읽어나가자니 내 마음에 사생(死生)과 성속(聖俗)이 함께 구비된 남산보다 더 넓은 동네 하나가 들어서는 듯 망외의 소득이 있었다. 그중의 한 대목. “경문왕이 즉위하자 왕의 귀..

날씨는 날氏다. 그이는 날마다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공중의 한 장막을 걷고 나타난다. 그렇다고 봄마저 그런 건 아니다. 봄은 언제나 대지를 무대로 한다. 바야흐로 피어나는 꽃들, 연두에서 초록으로 번지는 산색이 이를 증명한다. 뉴스 화면을 통해 이 알뜰한 계절을 미끌미끌하게 구경하는 건 봄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다. 오늘은 나에게 많은 식물 공부를 이끌어주시는 꽃동무의 누님의 농장을 찾아간다. 김천 농소면 봉곡리의 자두꽃을 잠깐 본 뒤 인근 백마산의 골짜기를 훑기로 한 것이다. 자두는 자도(紫桃)에서 변한 것으로 오얏나무라고도 한다. 오얏(李)은 내 성씨에 꽉 맞물려 있는 것이니, 신축년의 봄을 저 자두나무 아래에서 제대로 영접하자니 존재의 바닥을 일깨우는 흥분이 안 일어날 수 없었다. 참 따뜻한 햇살에..

계룡산 갑사는 천년 고찰이다. 대웅전에서 한 끗 비켜난 곳에 마음을 움푹 퍼가는 진경이 있다. 대적전 앞 배롱나무가 좋아 그늘로 가니 할머니 한 분이 승탑 곁에 보물처럼 쉬고 계신다. 슬그머니 돌무덤에 앉았다. 배롱이 참 훤칠합니다, 혼자 오셨나요. 요 아래 공주에 사는데 버스 타고 혼자 종종 나와요. 집에 있으려니 자꾸 등 아래가 푹 파이고 땅이 꺼져 들어가는 것 같아서요. 할머니는 시원스레 말을 잘 이어나간다. 저 나무가 얼마나 아름다운데요, 꽃 피고 곧 열매 맺더니 금방 서리 내리고, 뭐 한 해가 가요. 한바탕 웃음을 남기고 할머니 떠나고 나만 남았다. 할머니의 등 아래가 된 기분으로 배롱나무 아래 “寶物 第二五七號, 甲寺 浮屠” 표지석을 한참 본다. 이 무거운 돌에 왜 ‘뜰 浮’인가. 돌계단을 내..

환하다. 따뜻하다. 눈부시다. 봄이 오면 가장 크게 변하는 건 햇빛이다. 햇빛은 부피를 가지지 않는다. 제가 만나는 그것을 모두 그것으로 만들어준다. 산에 들어가서 숲, 강에 뛰어들어 강물, 바위를 만나면 고대의 침묵을 빚어낸다. 물오른 물참대 가지처럼 빳빳하게 내리꽂힌 햇살 사이로 걸어간다. 낙엽은 제 본래의 모양과 색을 모두 버렸다. 세상에게 받은 것은 고스란히 세상한테 돌려준 뒤 지하로 녹아드는 잎들의 최후. 경북 경주와 포항의 한 경계인 운제산 산여계곡. 운제(雲梯)는 구름의 사다리이다. 원효, 의상, 자장, 혜공. 숱한 고승들이 산과 계곡을 오르내리며 수행할 때 구름을 사다리 삼았다는 뜻을 살린 이름이다. 혼자 특출하게 높은 산은 없고 모두들 다정하게 어깨동무한 형제들처럼 봉우리와 능선이 죽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