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안을 마련하기 위한 다양한 차원의 논의가 한창이다. 국회 개헌특위의 활동이 지지부진하자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 차원의 개헌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으며, 시민사회에서도 이런저런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촛불혁명은 우리 사회의 근본 틀을 새롭게 규정할 개헌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을 터, 가능한한 여러 의견들이 검토되고 반영된 최선의 헌법안이 국민투표에 부쳐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런 논의 과정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사실 하나가 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래 우리나라에는 하나가 아닌 두 개의 헌법, 곧 공식 헌법과 함께 ‘이면헌법’(백낙청)이 존재해 왔다는 사실 말이다. 이 이면헌법은 분단이라는 비정상적 상황이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심각한 제약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여기는 등의 내용을 담..
최근 소셜미디어와 공론장에 새삼스레 이른바 ‘86세대’에 관한 담론이 넘쳐나고 있다. 영화 의 흥행과도 관련이 있지만, 우리나라 정치지형의 변화에 대한 진단의 맥락도 크다. 단순한 가십 거리가 아니다. 경향신문이 ‘장기 386시대’라는 역사기술적 명명까지 하고 나설 정도로 이 세대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은 시대진단의 핵심에 있다. 나 자신도 이 세대에 속하는데,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와 이 세대, 아니 ‘우리’ 세대의 본격적인 주류 등극을 연결 짓는 논의들을 보면서 솔직히 조금 착잡하다. 영화가 잘 묘사하고 있듯이, 1987년 우리나라는 특히 우리 세대에 속하는 숱한 이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에 ‘민주화’라는 역사적 성취를 이루어내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민주세력과 군부 세력의 어정쩡한 타협에 기초했던..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합당이 가시화되고 있다. 아직 향후 추이가 불투명하긴 하지만, 활은 이미 시위를 떠났다. 어떤 식이든 안철수발 정계개편이 이루어질 것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차기 대통령을 목표로 한 정치인 안철수의 집요함이 이 모든 사단의 출발점일 터다. 그는 지금 제대로 된 주인을 찾지 못한 보수의 땅을 개간해 자신의 영토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정치공학적 시선을 거두고 ‘촛불 이후’의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의 형성이라는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사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내가 볼 때 그의 이번 행보는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정치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서, 어쩌면 이를 통해 정치인 안철수는 자신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을 수행하게 될..
문재인 정부의 최우선적인 국정과제 중 하나인 ‘적폐청산’을 두고 시비가 끊이질 않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자유한국당 쪽이 그것은 결국 정치보복일 뿐이라며 반발하는 것은 물론이고,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까지 맞장구를 쳤다. 하긴 정권교체가 이루어질 때마다 이전 정권 담당자들의 비리를 파헤치는 일이 반복되곤 했으니 이번에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될 소지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전임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맞선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가 헌법과 민주주의를 파괴했던 과거 집권세력의 잘못을 징치하는 일이 비열한 정치보복과 같을 수는 없다.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는 것은 우리 헌법상의 국가적 과제이기도 하다. 어쩌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적폐청산을 넓은 의미에서 ‘전투적(방어적)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
촛불혁명 1주년을 맞은 요즈음 민주주의 논쟁이 한창이다. 그 혁명에 참여해서 새로운 대한민국을 외쳤던 시민들의 열망을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처럼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로 이해하는 것이 옳은지가 쟁점이다. 최장집 교수와 박상훈 박사의 비판은 아주 신랄하다. 그런 식의 이해는 대의제를 본성으로 하는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오해에서 비롯되었단다. 심지어 의회를 우회하려는 문 대통령 식의 정치는 군주정의 행태일 뿐이라고 극언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런 비판이야말로 오히려 촛불혁명이 열어 놓은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임채원 교수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촛불혁명은 전형적인 ‘마키아벨리언 모멘트’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포칵의 개념으로, 시민들이 위..
- 10월 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북한의 리용호 외무상은 최근 유엔에서 행한 연설에서 ‘국제적 정의’라는 개념을 통해 자국의 핵실험을 정당화했다. 미국의 횡포 때문에 유엔이 추구하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있어서 자위를 위해 핵개발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은 철저하게 정의의 원칙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국제사회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반항한다고 하여 피해자에게 제재를 가하는 만고의 부정의”를 저지르고 있다고 항변했다. 유엔이 상임이사회에 속한 강대국들의 입김에 지나치게 휘둘리고 있어 개혁이 필요하다거나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부당하다는 따위에 대한 지적이야 옳다. 그러나 북한이 수차례 핵실험을 강행하며 한반도에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 현 상황은 어떤 경우에도 정의로 포장될 수 없..
정기국회가 개원했다. 문재인 정부는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매우 성공적으로 출범하기는 했지만, 이제 본격적인 시험대에 들어섰다. 그 어지럽기로 소문난 ‘여의도 정치’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야당들은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국민의당 안철수 새 대표는 ‘강한 야당’에 대한 결기를 분명히 했고, 자유한국당은 엉뚱한 트집을 잡아 아예 국회 보이콧을 선언했다. 정의당을 제외한 야 3당은 이른바 ‘반문연대’를 형성할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자칫 정국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많은 개혁과제 해결이 때를 놓치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벌써부터 몇몇 논객들은 문 대통령이 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열망이나 국정운영에 대한 높은 지지율에만 기대려 한다며 우려하던 터였다. 문 대통령이 국민과의 소통만 내세우고 ..
아무리 민주적인 정당성을 가진 정부라도 쉽게 결정해서는 안되는 국가적 의제들이 있다. 특히 국가 전체의 운명과 관련되거나 그 결정이 미래 세대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사안들이 그렇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을 계속할 것인지의 문제 같은 것이 전형적인 예다. 이런 문제에 대한 결정의 정당성은 통상적인 사안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확보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를 단순히 전문가들의 결정에 맡길 수는 없다. 원전 관련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기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사안을 판단하리라는 보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설사 그들이 사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일이 가능하다고 해도, 문제되는 사안은 원전 관련 전문가들이 전혀 그 전문성을 주장할 수 없는 사회적·환경적 차원의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