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하나의 테스트(?)가 있다. 일단 종이 한 장을 준비해 펜을 든다. 그리고 자기 인생에서 소중하게 만난 인연, 귀하게 여기는 사람 열 명의 이름을 써본다. 열 명을 다 썼다면 자신이 쓴 이름들을 살펴보고 다음 질문에 몇 개나 대답할 수 있는지 체크해보자. 당신이 이름을 쓴 사람들 중에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있는가? 당신과 다른 수준의 학력을 가진 사람은 있는지? 나이차가 많이 나는 사람은? 성(性)적 지향성이 다른 사람은? 국적이나 피부색이 다른 사람은? 인권활동가 류은숙의 책 에 나오는 테스트인데, 내가 동그라미 칠 수 있는 이름은 아무리 후하게 평가해도 1개를 넘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알거나 꾸준히 만나는 사람 중에 소수자는 몇 명이나 될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올해 새로운 일을 맡..
10월의 마지막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즈음. 천안의 한 시골마을 길가에 낡고 찌그러진 흰색 카니발 차가 검게 그을린 채 발견되었다. 이 마을의 한 할머니가 차 안을 들여다보고 놀라 경찰에 신고했다.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른셋의 젊은 노동자가 차 안에서 연탄불을 피운 채 잠든 것이었다. 그는 삼성전자서비스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결혼 전 자신보다 네 살 어린 아내와 자주 데이트를 하던 그 마을, 수백년 된 나무 아래가 그가 생을 마감한 마지막 자리였다. 그의 이름은 최종범. 우리는 이제 그를 ‘열사’라고 부른다. 짧았던 청년의 삶의 끝자락 100여일의 흔적,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 때문이다.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죽어라 일만 했다. 하루에도 14시간씩 점심식사조차 거르며 주말도 없이 일만 ..
문재인의 대선 패배는 선거 부정 때문이 아니다. 그의 열렬한 지지자라 할지라도, 국정원과 기타 조직의 선거 개입이 없었다면 문재인이 이겼을 것이라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17대 대선에 비해 무려 12%나 솟구친 75%의 투표율을 보며 야권 지지자들은 환호성을 내질렀지만, 그들 중 거의 대부분은 개표방송이 시작되기 전까지, 그것이 ‘잠자던 대학생들의 야권 표’가 아닌 ‘정치에 소외되어 있던 50대 이상의 여당 표’임을 눈치채지도 못하고 있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기업이라는 단 하나의 조직만을 남겨둔 채 그 나머지를 급속히 파괴했다. 우리는 기업 속에서 사장님과 직원이 되고, 기업 밖에서 소비자와 유권자가 될 뿐이다. 이렇게 불안에 빠진 파편화된 개인이 늘어난다는 것은 곧 사회가 우경화된..
촌지를 받지 않는 교사, 학급문집이나 학급신문을 내는 교사,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과 상담을 많이 하는 교사, 신문반·민속반 등 특활반을 이끄는 교사, 지나치게 열심히 가르치려는 교사, 반 학생들에게 자율성·창의성을 높이려 하는 교사, 탈춤·민요·노래·연극을 가르치는 교사, 생활한복을 입고 풍물패를 조직하는 교사, 직원회의에서 원리 원칙을 따지며 발언하는 교사, 아이들에게 인기 많은 교사, 자기 자리 청소 잘하는 교사…. 1986년 ‘교육민주화선언’ 이후 문교부가 일선 교육청에 내려보낸 ‘전교조 교사 식별법’이라고 한다. 법외노조라는 길을 걷게 된 전교조의 현재 상황을 떠올리며 읽고 있자니, 두 가지 풍경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첫 풍경은 검찰 포토라인에 선 3선 현직 교육감의 모습이다. 교육청 직원들로부터..
미국 연방정부가 이른바 ‘셧다운’에 돌입한 것은 지난 1일의 일이다. 이미 충분히 국내에도 보도되고 또 소개된 사건이지만 다시 한번 그 전모를 살펴보자. 오바마 대통령이 도입한 미국 건강보험 개혁안인 이른바 ‘오바마케어’(ACA)를 두고 공화당 강경파가 하원에서 반발했다. 상원은 민주당, 하원은 공화당이 우세한 탓에 하원에서 요구하는 법안 수정을 상원은 계속 거절했고, 대통령 또한 ‘오바마케어’를 무위로 돌리기 위한 공화당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았다. 공화당 강경파는 버티기 끝에 연방정부의 예산안을 10월1일까지도 통과시키지 않았고, 그리하여 미 연방정부 소속 공무원들은 본의 아닌 무급휴가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의회와 정부가 첨예하게 대립한 결과 정부가 제 기능을 못하게 된 이 사건을 두고 ‘민주주의의 ..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공간이나 시간이 있다. 내게는 헌책방이 그랬다. 느지막이 아침을 먹고 난 일요일,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헌책방 거리를 순례하곤 했다. 마지막 코스인 단골 서점에 들어서면 아버지와 나는 각자의 구역으로 흩어졌다. 난로 위에 주전자가 놓여 있는 그 서점은 늘 따뜻했다. 내가 좋아하는 구역은 책이 양쪽으로 쌓여 있는 통로의 구석이었다. 체구가 작은 어린이가 들어가기에 맞춤한 자리는 아늑했다. 이 책, 저 책을 들춰보며 사달라고 할 책을 고르다가 읽고 싶은 책을 손에 들고 그 자리에 파묻히던 순간은 평온 그 자체였다. 헌책 냄새만 맡아도 마음이 편해지는 건 바로 그때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고등학교 때 처음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 발을 디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교보문고에는 천..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돼!” 삼성그룹의 고 이병철 회장이 남긴 이 말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을 만큼 삼성 자본의 ‘무노조 경영’을 상징하는 지표이다. 삼성 자본은 지금까지도 헌법에 위배되는 이 말을 지키기 위해 갖은 수를 쓰고 있고, 대다수 국민들이 노동권을 지키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을 저해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36년 전 김포의 제일제당 공장에서는 여성노동자 최저생계비 월 4만5000원에 한참 못미치는 월급 2만원을 받으며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이 인간 이하의 삶을 더는 견딜 수 없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그러나 노조 설립신고를 마치기 무섭게 이 여성노동자들은 조직폭력배들의 난동과 위원장 해고로 열흘 만에 신고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민..
오랜만에 모여 앉은 가족과 친척들은 종종 싸우기 마련이었다. 예전에는 명절날 만난 친척들끼리 정치 얘기로 목청을 높이다 경찰서 신세를 지거나 심지어 강력사건을 저지르기도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언론들은 선동적인 기사와 헤드라인으로 불을 붙였다. 가령 2000년 추석, 이제는 전설처럼 입에 오르내리는 1면 헤드라인을 다시 떠올려보자. “추석 분위기가 썰렁하다. 전국 어디를 둘러봐도 마찬가지다”라는 저 유명한 문구로 시작되는, ‘대구, 부산엔 추석이 없다’(동아일보, 2000년 9월9일)가 바로 그것이다. 저렇게 선전과 선동이 담긴 신문을 읽고 고향집에 돌아가면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가족’이 앉아 있다. 싸우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인터넷이 기존 언론의 역할을 넘겨받기 시작한 2000년대 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