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샵(포토샵)’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목구비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뽀사시’하게 만드는 기술이 핵심이었다. 그 핵심 기술은 이제 유행이 지났지만, 사진에서 약간의 보정은 필수 과정처럼 정착했다. 포토샵이 일상화되다 보니 어쩌다 마주치는 여권 사진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사실은 보정 기술을 전혀 쓰지 않은 여권 사진의 내가 실제의 나와 가장 가까운 모습인데도 말이다. 사진뿐만이 아니다. 너무 흔해져 성형했다고 하기도 뭣한 쌍꺼풀 수술처럼 언어에도 ‘뽀샵’ 기술이 일상화된 느낌이다. 이름과 실재가 일치하는 ‘정명(正名)’은 고사하고, 본래 뜻과는 전혀 다르게 쓰이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체’가 그 대표적인 예다. 완전체의 사전적 정의는 ‘완전히 모든 것을 다 갖추고 ..
홍명교 | 사회진보연대 활동가 영화 에는 얼굴 없는 사람이 나온다. ‘센트럴캐슬’이란 호화찬란한 이름의 아파트단지에 사는 성공한 가장 성수(손현주)가 느끼는 불안의 근원은 도무지 그 얼굴 없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두꺼운 잠바를 입고 헬멧을 눌러쓴 채 고급 아파트 단지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정체불명의 사람은 성수 내면의 근원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억압된 것의 귀환, 그의 어린 시절로부터 비롯된 어떤 정신적 외상을 돌아보게 한다. 모름지기 대상의 실체를 알 수 없을 때 공포는 극대화되기 마련이다. 성수가 절대 알 리 없는 지방 소도시의 허름하고 낡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험악한 표정으로 영화의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장치로 등장한다. 어쩌면 이것은 관객들을 불쾌하게 만들..
문화평론가 허지웅씨가 “국정원 이슈는 문제지만 시국선언은 오버라고 생각”한다고 트위터에 글을 쓴 것은 8월18일 오후 9시24분의 일이었다. 그는 “지금의 촛불도 취미활동 이상의 충분한 당위를 찾을 수 없다”고 따끔한 비판을 내놓았다. 이 발언은 사건을 보도하는 게 아니라 보도를 사건하는 언론들에 의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됐다. 여기서 우리는 저 발언 속에 몇 가지 전제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국정원 이슈가 큰 문제다. 둘째, 그러나 그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시국선언이나 촛불시위 등을 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셋째, 촛불시위는 한낱 취미생활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며, 아니어야 한다. ‘촛불이 취미냐’라는 말이 유독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특히 ..
“김미영 팀장입니다. 고객님께서는 최저 이율로 최고 3000만원까지 30분 이내 통장 입금 가능합니다.” 일명 ‘스팸 문자의 여왕’으로 불리는 김미영 팀장님의 메시지다. 2011년 김미영 팀장이 30대 중반의 남자였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녀는 여전히 대출 문자의 대명사로 남아 있다. 이 분은 1년간 총 100억원 상당의 대출을 중개해 7억7000만원의 이익을 챙겼다고 하는데 이 부당이익보다 현실의 김미영 팀장이 남성이라는 사실에 놀란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외로울 때의 특효약으로 김미영 팀장 대신 홈쇼핑을 추천하는 사람도 있다. 약속 없는 주말에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거리다가 입에 거미줄이 쳐지는 기분이 들 때 홈쇼핑만 한 위로는 없다는 것이다. 훈련받은 쇼호스트 특유의 ‘솔’톤 목소리로 빠르게 반복..
“나는 삼성이랑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어제 아침 한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로부터 들은 말이다. 나는 삼성전자서비스 ○○센터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었고, 그는 하루 15시간 노동의 고된 발걸음에 나서던 중이었다. 무더운 여름 하루도 쉬지 않고 삼성전자서비스 로고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삼성전자 제품을 가득 안고 나서는 그가 왜 그렇게 말했을까? 순간 최근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영화 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이를 뺏긴 한 남자가 팔이 잘리는 형벌을 받았을 때, 열차의 2인자 메이슨은 남자의 머리 위에 구두를 올려놓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다. 구두는 머리에 쓰는 것이 아니듯 꼬리칸의 ‘천박한 것들’은 이곳의 질서를 넘어서는 행동을 ‘감히’ 자행해선 안된다고 말이다. 우리는 이미 현실에서 이런 강..
이른바 ‘20대 담론’이 지난 몇 년간 유행했지만 수많은 논의들이 냉소와 한탄으로 끝난 이유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세계 및 동아시아의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급진적 무장투쟁을 통해 체제의 붕괴를 꾀하는 방법론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한국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 헌법 개정을 이루어내면서 이후 안정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세상을 바꾸거나 적어도 유의미한 영향을 주려면 결국은 정치적으로 결집해야 한다. 군 입대 전 직장을 그만두고 현재 자유기고가 겸 번역가로 살아가고 있는 필자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의해 지역가입자로 분류되어 있다. 혼자 살고 있으므로 부양가족은 없으며, 현재 월세로 살고 있는 집의 세대주이기도 하다. 물론 어찌어찌 생..
지난 16일 청와대 청년위원회 출범식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청년 창업과 관련해 “부모님이 자식 생각하듯이 한번 도와줬으니 됐다가 아니라 일어설 때까지 지원하는 시스템으로 정부가 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정말 주옥같은 말이다. 창업을 했거나, 하려는 청년들에게는 장마에 비 그친다는 말처럼 반가운 소식일 것이다. 나 역시 내 주변에 창업으로 울고 웃는 청년들이 넘쳐난다. 같은 사무실에 있는 친구도 최근에 창업지원 프로젝트에 선정되었다고 참 기뻐했다. 지난 설연휴에는 고향에서 만난 친구가 커피숍을 낸다고 온갖 돈을 다 끌어오고 대출까지 받았단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목 좋은 곳을 찾는다고 나를 끌고 온 시내를 돌아다녔다. 얼마 전에는, 커피숍을 낸 지 1년 정도 된 후배가 운영이 어려워 가..
지루하게 비가 내리는 여름이다. 몇 년 전, 이런 식으로 계절감을 잃어버리고 지낸 적이 있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출발해 사무실 지하주차장에 도착하는 출퇴근을 반복하던 때였다. 어느 순간 내가 더 이상 일기예보를 확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날씨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사무실과 집은 물론이고 마트나 영화관 등 자주 가는 대부분의 장소에도 지하주차장이 있기 때문이었다. 차를 지하에 댄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실내에 도착하면, 밖의 날씨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지는 것이었다. 계절과 상관없이 적당한 습도와 온도, 그리고 조명까지 유지하는 실내에 앉아 통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은 바로 그 느낌과 비슷하다. 한 발짝만 밖으로 나가면 우산을 써도 사정없이 들이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