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K드라마, K뷰티, K푸드 등 세계를 휩쓰는 한류에 또 하나의 아이템이 합류했다. 전염병 대응의 모범으로 떠오른 한국식 방역. 거기에는 재빨리 ‘K방역’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세계 곳곳에서 한국의 검사, 격리, 치료의 노하우를 구하는 요청이 쇄도한다. 진단키트, 방호복과 글러브 등 국산 의료용품의 수출도 급격히 늘고 있다.이 모두가 사태 수습에 앞장선 영웅들 덕이다. 선제적으로 대응한 질병관리본부, 앞을 내다보고 미리 진단키트를 개발한 의료벤처, 환자들의 치료를 맡은 우수한 의료진, 살인적 초과노동을 견딘 헌신적 공무원들, 수습의 사령탑 역할을 한 정부. 드높은 시민의식으로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를 철저히 실천한 국민들. 모두 박수를 받을 만하다.우리가 신규 확진자 수 0에 접근해 가는 지금..
비극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연민과 공포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래된 진단이다( 6장).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잤는데 그걸 뒤늦게 알고 울부짖다가 제 눈을 찔러버리는 남자의 이야기, 그런 것을 그리스인들은 야외극장에서 보았고 연민과 공포를 느꼈다. 둘 중 하나를 특별히 강하게 느끼는 인간이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고대의 연극론은 인간 유형론으로 전용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연민의 인간’과 ‘공포의 인간’이 있다고 말이다.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하룻밤을 보낼 때, ‘타인’에게 닥친 비극을 동정하느라 진이 빠지는 연민의 인간과 ‘자기’에게 닥칠 비극의 가능성을 상상하며 전율하는 공포의 인간은 서로 다른 결심을 하며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연민은 “부당하게 불행을..
코로나19 사태 초기만 해도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 겸 중앙방역대책본부장은 건강해 보였다. 그 뒤 정 본부장의 모습은 점차 초췌해졌는데, 외모만 본다면 요 몇 달 사이 10년의 시간이 훌쩍 지나간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 본부장의 일정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아침 7시, 새벽 사이에 발생했던 코로나19 소식을 보고받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해 8시 방역대책본부 회의에 참석하고, 11시에는 확진자 관련 역학조사 결과를 검토한다. 이런 일정은 밤늦게까지 계속되는데, 자정부터 새벽 2시까지 종합보고를 받고 전략 수립을 세우는 게 끝이라는 대목에 이르면 할 말을 잃게 된다. 주 52시간이 의무화된 시대에 하루 14시간씩, 휴일도 없이 일하는 분이 있다니, 아무리 비상시국이라 해도 좀 너무한 게 아닌가 싶다.원래 ..
와룡공원에서 출발해 북악산을 걷는다. 내가 사람의 얼굴을 달고 있기에 그런가. 세상의 모든 돌에는 오래 묵은 표정이 하나씩 들어 있는 것 같다. 세월의 이끼를 단단히 품고 있는 한양도성의 성곽돌. 어금니를 꽉 깨물고 심각하게 밀담을 나누는 친구의 옆모습을 닮았다. 여러 번 와 보았지만 볼 때마다 전혀 새로운 길. 쥐똥나무 울타리로만 기억했는데 개나리가 늠름하다. 오늘은 유독 소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이웃한 인왕산엔 소나무에 대한 다소 건조한 소개글이 있다. “5월에 개화하여 9월에 결실한다. 바늘잎이 2개씩 뭉쳐나며, 2년이 지나면 밑부분 바늘잎이 떨어진다.” 북악산엔 나라의 중심답게 이런 안내판이다.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자라는 바늘잎나무입니다. 땅이 메마르고 척박하여도 소나무는 별로 가리지 않습니다..
유권자들이 만들어 준 결과만 뺀다면, 이번 총선은 엉망진창이었다. 무엇보다 기억할 만한 공약이 없었다. 이 당이든 저 당이든 왜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건지, 다수당 또는 과반수가 되면 뭘 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세상은 다만 문재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둘로 쪼개지는 것처럼 보였다. 대통령이 일할 수 있으려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정부를 심판하려면 미래통합당을 찍으라는 게 전부였다. 둘로 쪼개진 세상에서 정의당 같은 진보정당의 자리는 찾을 수 없었다. 민주당은 통합당만큼 엉망은 아니었지만, 변변하게 내세울 게 없었다는 점은 같았다. 둘 중 하나만 강요하는 게 선거판의 속성이라지만, 내일을 위한 건설적인 대안 제시는 온통 MB식 개발공약에만 머물렀다. 막말은 차고 넘쳤다. 김대호, 차명진의 이름을 다시 거..
선거 끝나고 비가 왔다. 이토록 멀쩡하던 공중에서 비가 오다니! 비가 와도 아무도 놀라지 않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비는 누구에게만 오는 게 아니라 모두에게 온다. 우리말의 닿소리 비읍(ㅂ)은 작은 사다리 같은 것. ‘봄비’에는 그 사다리가 두 개나 들어 있는 셈이다. 그러니 지금 봄비를 맞으며 이은하의 ‘봄비’를 읊조리는 이는 빗줄기를 잡고, 아니 사다리를 짚고 그 어디 하늘가로 닿는 중이기도 하겠다.가느다란 봄비는 이제 곧 나무의 천하를 더욱 싱그럽게 바꾸고, 산은 물론 우리 사는 세상까지도 바꿀 태세다. 이는 저들이 지난가을에 이미 시범을 보인 바이기도 하다. 투표하듯 잎을 일제히 떨군 덕분에 혹독한 겨울을 이겨낼 수 있었다. 모처럼의 후련한 빗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히더니 작년 이맘쯤의 유쾌한 기억..
21대 총선이 끝났다. 유권자들은 코로나19에 기죽지 않고 마스크를 쓰고 2000년대 최고 투표율을 기록했다. 전체 판세 예측보다 관심을 가졌던 것은, 우리 과 학생들이 참여한 선거운동 이야기였다. 코로나19 때문에 구인공고가 뜨지 않아 졸업도 미루고 선거운동원으로 알바를 했던 학생의 이야기를 들었다.영남에서 더불어민주당 깃발을, 호남에서 미래통합당 깃발을 들고 선거를 하는 것은 만만치 않다. 우선 지역주의 때문이다. 첫번째는 역사적으로 구축된 지역주의. 실질적으로는 박정희 정권부터였을 것이다. 경부 발전 축의 동쪽은 성장연합에 포함됐고, 대통령을 5명이나 배출한 대구·경북은 보수우파의 정점에 있었다. 반면 서쪽은 성장연합에서 배제됐고, 군부 쿠데타로 집권을 획책한 전두환 일당은 1980년 5월 광주시민..
행복이라는 말. 달콤한 사탕처럼 입안에 넣고 중얼거리기에 좋은 단어. 이 말이 언제 처음 내게 왔는지는 모르겠다만 오래된 습관처럼 입에 착 들러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많은 사람들의 오목한 흉중에도 그런 샘이 하나 있어 필요할 때마다 부서질 것 같은 질그릇으로 그것을 떠마시는 것 같았다. 행과 복, 중복되는 느낌이 없지 않은 이 단어는 언제 처음 등장했을까. 서양의 happiness에 대응하는 말로 근대에 생겨났을 것으로 짐작할 뿐, 옛 문헌에는 없다고 한다. 동양의 옛사람들은 자신의 사생(死生)은 물론 저 행복을 좌우할 부귀(富貴)를 하늘에 맡겼다는 것. 한 인간이 어떻게 해 볼 영역의 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마치 순우리말처럼 참 친근한 단어인 행복은 생활의 조미료처럼 오늘날 널리 쓰인다. 어느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