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이라고 하면 곧장 쌀밥을 떠올리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여름에는 한탄강, 겨울에는 두루미의 고장이다. 나의 경우 그 사이에 절 이름 하나가 슬쩍 끼어들기도 한다. 얼음 트레킹, 멸종위기종인 분홍장구채 관찰 등 몇 번의 철원 여행에서 백마고지, 노동당사는 둘러보았지만 그 아름답다는 절을 이정표에서 확인하고 그냥 지나치기만 했다.고대산 지나서 철원의 경계에 들어서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중이었다. 절이라는 곳은 저물 무렵에 가야 더욱 특별한 맛이 나는 법이다. 철원에서 저녁을 맞이했으니 방향은 딱 한 곳으로 정해졌다. 길 위에서의 바쁜 마음을 추슬러 이번에는 곧장 그 절로 들이닥쳤다.일주문을 지나자마자 아담한 절이 바로 나타났다. 도피안사(到彼岸寺)는 깨달음의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뜻이며, 통일신라 경문왕 ..
사회적으로 글을 쓰는 것의 허망함을 지금보다 더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말도 감염의 확산을 막을 수 없고, 어떤 말도 감염으로 만들어지는 여파를 감당해 낼 수 없다. 그럼에도 무엇인가를 써야 하는 순간, 전해야 하는 말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1월 말부터 전염이 시작된 코로나19는 2월 초순을 지나 정체돼 ‘안도’의 한숨을 쉴 만하니 곧바로 ‘창궐’의 수순을 밟았다. 신흥종교 신천지의 포교 방식이든, 중국인들을 ‘원천봉쇄’하지 못한 효과가 늦게 발생했기 때문이든, 결과는 나쁜 쪽으로 전개됐다. 확진자 수는 600명을 넘어섰고, 외부인 감염이 아닌 지역사회 감염이 사실상 확정된 상황이다.무엇이, 누가 이 사태를 만들어 냈는지 다양한 설이 떠다닌다. 중국인의 입국을 막지 않은 정부냐, 몰래 병을 옮..
북극의 빙하가 해마다 줄어든다고 한다. 터전을 잃고 몸이 홀쭉해진 북극곰 사진을 보았다. 먹이를 찾아 홀로 방황하는 흰곰. 점점 줄어드는 빙하의 면적이 곰의 발목을 점점 올가미처럼 죄는 것 같았다. 기후변화로 인한 그 처지를 한반도에도 적용시켜 본다. 겨울에도 적설량, 눈 오는 일수가 적어진다. 무엇보다도 눈 쌓인 면적이 졸아든다. 강원도로 가서야 겨우 제대로 된 눈을 만나볼 수 있다. 이러다간 나의 겨울 정신도 북극곰의 육체처럼 핼쑥해지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을까.퍽이나 다행스럽게 최근 눈 소식이 들렸다. 심설산행을 도모하러 백두대간의 마산봉-대간령 구간을 걸었다. 진부령 입구 흘리에서 스패치, 아이젠을 착용하는데 모처럼 쓸모를 만난 장비들이 덩달아 흥분하는 것 같았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산행을 천왕봉..
칠언율시, 오언절구, 사자성어를 생각해 본다. 팽나무 씨앗에 팽나무의 모든 미래가 온축되듯 한자에는 한 글자 너머의 뜻이 깊이 쌓인다. 세 글자의 단어도 있다. 어느 철학책에서 만난 ‘단독자’는 날이 갈수록 새록새록 새겨지는 말이다. 지금 나에게 와닿는 말 하나를 고르라면 단연 ‘광합성’이다. 산에 다니면서 식물에 대한 궁리 끝에 길어 올린 것이다. 이 세상을 먹여 살리는 밑바탕이 바로 저 세 글자에서 비롯되지 않겠는가.오래 묵혀둔 숙제를 풀려고 한국고전번역원에 왔다. 뒤늦게 고전에 입문하려고 해보지만 굳어진 머리와 고드름처럼 자란 나이가 발목을 잡는다. 맹자의 한 대목에서는 천하에서 공히 존중하는 셋 중의 하나로 나이를 들기도 하지만 이게 결코 자랑은 아니다. 어차피 홀로 걷는 길, 또 한번의 결기가 ..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겠다고 했지만 시점이 문제다. 그 의도가 의심받기에 충분했다. 하필 살아있는 권력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사건을 두고 기존 관례를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왜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사건부터 법무부가 공소장 제출 거부와 비공개를 결정한 것인지 설득력 있는 이유를 대지 못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공소장 원문이 아니라 공소사실의 요지자료를 제출한 근거로 ‘형사사건 공개금지 등에 관한 규정’을 들지만 국회의 자료제출 요구는 법률체계상 상위규범인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른 것이다. 법무부의 비공개 결정이 국회와 법률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국민의 알권리를 무시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는 국민적 관심이 ..
영웅은 난세에 태어난다고, 최근 이 말을 실감하게 만드는 분이 바로 추미애 법무장관이다. 추 장관이 취임한 것은 문재인 정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다. 대통령이 조국 교수를 법무장관에 임명한 것은 비리 혐의자를 참지 못하는 윤석열 검찰총장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밑바닥이 다 드러난 조 전 장관이 황급히 사퇴했지만, 수사의 칼끝은 이미 정부의 핵심을 겨누고 있었다. 자칫하다가는 총선 참패는 물론이고 정권이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 문재인 대통령은 추 장관을 구원투수로 내보냈다. 이 선택이 의외였던 것은 그 이전까지 추 장관의 정치 이력에서 남다르게 뛰어난 점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이라는 희대의 삽질에 동참했던, 현 정부의 실세라 할 친문들이 곱게 봐주기 힘..
메뚜기의 한철 출몰처럼 사이클이 매우 짧은 영화판에서 점점 더할 나위가 없는 새로운 경지를 밟아가는 이 개봉하기 전 공개한 시놉시스를 보면서 카프카의 이 떠올랐었다. 봉준호의 영화는 가족을 다루기는 했으되 카프카의 소설과는 전혀 결이 달랐다. 가족과 기생충을 연결했던 내 어설픈 짐작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른바 사회적 계급을 건드린 영화는 가족들끼리의 소외가 아니라 가족과 가족 간의 싸움이었다.최근 몇 주간 집 안에 스스로 발목을 가뒀다. 오래 묵혀둔 숙제를 거창한 핑계로 삼았다. 산에 못 가니 자꾸 화면 속으로 빠져든다. 좀 모르고 살아도 되는데 어쩌자고 나의 손바닥은 이리도 복잡한가. 그 좁은 면적 안으로 세상만사가 집결하고 그것은 이내 마음속 여러 갈피를 끄집어내기도 한다. 근거 없는 불안과 지나..
수사권 조정 법률안이 통과되자 곳곳에서 경찰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당장 대통령부터 국가경찰과 자치경찰로 이원화하고, 국가경찰은 행정경찰과 수사경찰로 분리하자며 관련 법안의 신속한 처리를 주문하고 있다. 검찰개혁과 경찰개혁은 하나의 세트로 움직여야 한다는 거다. 전혀 다른 차원의 목소리도 있다. “국민에게는 검찰개혁이라고 속이고 결국 도착한 곳은 경찰공화국”이란 악담이 그렇다. 물론 검사의 말이다. 그래도 “경찰개혁안은 어디로 사라졌냐”는 질문에는 답변이 필요하다. 일단 사실관계부터 따져보자. 수사권 조정으로 검찰 권한은 줄어들고, 경찰 권한은 더 커졌을까?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검사의 수사 지휘를 없애고, 검사와 경찰관이 ‘서로 협력한다’고 바뀌는 건 맞지만, 이는 명목에 불과할 뿐, 수사의 실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