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을 출간하고 독자의 항의 메일을 받았다. 사회의 이슈들을 짚어보는 글쓰기가 업인지라 종종 욕설로 도배된 불만을 접하는 게 익숙한 편이지만 너무 구체적이라 놀랐다. 책의 첫 장인 ‘고 변희수 하사’ 사례를 언급하며 왜 트랜스젠더를 옹호하냐, 성소수자 입장만 대변하는 이유가 뭐냐, 학생들이 읽고 동성애자 되면 당신이 책임질 거냐 등의 내용이었다. 누가 읽을까 봐 중고책으로도 안 팔 거다 등의 악담도 덧붙였다. 그래도 나는 친절히 장문의 반론을 보냈다. 하지만 간단한 답이 돌아왔다. “역시 자기만 옳은 줄 아네요. 그런 사람을 꼰대라고 하죠.” 고정관념을 건드리면, 고정관념도 다양성 아니냐면서 발끈하는 이들을 종종 본다. 특정 조직 안에서 관성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경우라면 더 심하다. 이들은 조직과 조직..
“노동조합 하면 재계약에서 떨어질 거예요.” 1년 전 노동조합을 만들겠다며 분주하게 뛰어다니던 노동자는 자신이 곧 재계약에서 탈락할 거라고 말했다. 오는 8일이면 쿠팡물류센터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지 1년이다. 한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물류센터 노동조합이 만들어졌지만 기대와 달리 조합원들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쿠팡 노동현실에 관심을 가져온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하길 꺼려하는지. 쿠팡부천물류센터 코로나19 집단감염 사태로 드러난 쿠팡의 노동조건은 오랫동안 노동 분야를 취재해온 기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97%가 넘는 일용직·계약직, 3개월, 9개월, 1년 단위로 단기계약을 반복하는 ‘쪼개기 계약’을 통한 고용불안, 극단적인 노동강도로 인한 과로사, 휴대폰조차 반입되지 않는 ..
전북 진안 진성중학교 아이들아! 지난 5월20일, 두 시간 남짓 너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지. 2~3학년 모두 합쳐 전교생이 아홉 명밖에 안 되는 작은 학교였지만, 둘레에 산과 들이 있어 참으로 편안하게 보였단다. 자연이 살아 있는 이곳에서 너희들 얼굴에 아침 햇살과 같은 빛나는 기운이 번졌으면 좋겠어. 너희들이 행복해야만 어른들도 행복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오늘은 강연 시간에 못다 한 날씨와 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한단다. 너희들이 사는 진안에도 비가 내리지 않아 걱정이 많더구나. 내가 사는 합천에도 비가 내리지 않아 산밭에 심어둔 마늘과 양파가 배짝배짝 다 말라죽어 가고 있어. 그래서 유월 초순 무렵에 뽑아야 할 마늘을 요즘 뽑고 있어. 얼마나 땅이 말랐으면 풀도 잘 자라지 않아. 이 모두 ..
5월이다. 언제 왔는지 모르게 스며든 봄이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마음껏 뽐내는 때다. 연둣빛 새싹이 포근한 봄볕을 받아 건강한 초록 잎이 되고, 잡초와 덤불로만 생각했던 곳에 장미, 철쭉과 같은 꽃들이 피어나 제 이름과 향기를 알리고 있다. 어린잎이 성장하고 꽃이 피어나는 과정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법(法)이라는 한자는 ‘물(水)’과 ‘가다(去)’라는 한자가 모여 만들어졌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것이 곧 법이라는 옛 선인의 지혜다. 법을 만드는 국회가 이상하다. 지난달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검찰청법 개정안이 통과되었고, 3일 임시국회에서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의결될 예정이다.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검수완박)로 부르든, ‘검찰 정상화’라고 부르든 이번 법률안 처리과정에서 국회가 보여준 모습은 매..
대학 강의를 할 때, ‘자신의 삶에 영향을 준 것들’이란 주제로 에세이 과제를 내곤 했다. ‘사회화’를 입체적으로 느껴보자는 의도였지만, 자기소개서에 익숙한 학생들은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버릇을 감추지 못했다. “해외에서 오랫동안 지내서” “1년 넘게 어학연수를 하면서” “몇 개월간 유럽 배낭여행을 해보았기에” 등을 언급한 후 밑도 끝도 없이 ‘그래서’ 세상 보는 눈이 넓어졌다,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났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증거는 한 줄도 없었다. 나는 이들과 학기마다 불평등에 대해서 토론했고 이를 응축한 것이 라는 책이다. 제목처럼, 노력이 부족한 결과를 차별하는 건 당연하다는 사람들이 많아진 시대를 짚었다. 견문이 넓어졌다는 아무개가 “비정규직 노동자가 날로 정규직 되려고..
지난겨울부터 이른 봄까지 다섯 달 동안이나 비와 눈이 내리지 않아 산골 어르신들의 걱정이 태산 같았다. 나라 곳곳에 산불이 나서 산골에 살던 농부들이 오랫동안 살던 집을 잃고 애간장을 태운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남의 일 같지가 않다며 한숨을 푹푹 쉬셨다. 해마다 삼월 중순 무렵이면 마을 아지매(할머니)들과 쑥을 뜯어 쑥국을 끓여 나누어 먹곤 했다. 그런데 올해는 하순 무렵에야 덤불 사이로 겨우 돋아난 쑥을 캐서 쑥국을 끓여 먹었다. 50년 만에 닥친 큰 가뭄이라 밭둑이나 언덕에 쑥이 자라지 않아 다른 해보다 열흘 남짓 늦게야 쑥국 맛을 보았다. 푸석푸석 먼지만 잔뜩 일어나는 산밭에 거름을 뿌리고 땅을 갈아 감자 심을 두둑을 만들어 놓았다. 하도 먼지가 일어나 마스크 쓰고 농사일을 하려니 숨쉬기가 무척 ..
군대 훈련소 시절, 정치인 아무개가 부대 방문을 해서 훈련병과 식사하고 기자들이 사진 찍는 시간이 있었다. 재수 없게도 내가 높으신 분들 앞에 앉게 되었다. 모자에 별이 달린 장군은 격의 없는 소통의 자리이니 편하게 말을 하라고 했지만, 나는 전날부터 외우고 연습했던 대로 “괜찮습니다!”, “맛있습니다!”만 외쳤다. 먹지 못하는 오징어가 반찬으로 나왔지만 씩씩하게 먹었다. 24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까지도 내 인생 가장 불편했던 식사로 기억되어 있다. 대학원 건물에는 교수 전용 화장실이 있었다. 이를 특권이니 그러면서 문제 삼은 학생은 없었다. 오히려 화장실에서만큼은 교수와 마주칠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권위적인 게 싫다는 어떤 교수는 전용 화장실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학생과의..
대통령 선거로 전국이 들썩이던 9일 김도현씨는 상복을 입은 채 고용노동부와 경찰서를 정신없이 오갔다. 이틀 전 일하다 사망한 작은할아버지의 사고경위가 ‘교통사고’로 처리돼 수사를 종결하려는 경찰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경기 화성경찰서는 공사장에서 사망한 지게차 운전자 A씨(69)의 사망원인을 회사 측의 말만 듣고 교통사고로 판단했다. 사망현장은 폴리스라인 하나 없이 훼손됐고, 사망 당시의 CCTV가 있었지만 확인조차 하지 않은 결과였다. 노동부는 중대재해로 인지했지만 상중이라 경황이 없을 것 같아 장례 후 유가족에게 알리려 했다고 한다. “왜 그걸 당신들이 판단하세요?” 도현씨가 항의했다. 가족 중 누군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을 때 유가족들은 경황이 없는 와중에 죽음의 원인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 제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