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이란 개인이 소속된 ‘국가’의 기록이다. 국가라는 공동체는 국적을 가진 구성원을 국민으로 보호하고, 국민은 의무를 부담한다. 개인에게 최초 국적은 어떤 의미에서 고정적이다. 생물학적으로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국적은 변경될 수 있다. 국적은 국가라는 공동체의 운명과 함께하는 것이므로 국가가 없어지면 구성원의 국적도 함께 바뀐다. 8·15 해방 이후 일본에서 연합군총사령부는 일제강점기 일본에 살고 있던 조선인의 일본 국적을 박탈하고 ‘조선적’이라는 외국인으로 등록하게 했다. 외국인은 보호를 받을 국적국이 있어야 하지만 당시 외교적으로 조선이라는 공동체는 없어졌고 아직 남한과 북한이라는 국가공동체는 생겨나기 전이었다. 따라서 ‘조선적’이라는 국적은 법적으로 유..
며칠 전 강의를 했다. 참석자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한 분의 사연에 속으로 조금 감동했다. 아들 등굣길을 바래다주다 바빠서 전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그러다 문득 생각나서 나중에 아들에게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남겼다고 한다. “네가 급하거나 다쳤을 때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는 건 장애인들이 열심히 싸워서 얻어낸 덕분이야.” 그 메시지가, 내가 매달 쓰는 칼럼에서 이루고 싶은 것이었다.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경험이나 기억 속에서 쟁점을 발견하고 의미 있는 고민을 던지는 일 말이다. 글이 사람들에게 전해지려면 사람들의 경험세계 속에 있는 것을 재료로 삼아 이야기해야 한다. 그런 이야기는 사회가 공유하는 집단기억을 참조하며 갱신한다. 지지난달 미국에 갔을 때, 여성과 흑인에 관한 전시, 음악과 공연, 책과 저술..
오랜만에 도시 중학교 진로특강을 하면서 아이들한테 물었다. “요즘 어른들한테 배울 수 있는 게 무엇이 있나요?”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대답을 했다. “영어요. 그리고 수학요.” “국어요.” “선생님, 영업도 배울 수 있어요.” “아니 영업이라니요?” “우리 아버지가 자동차 영업 사원인데요. 자동차 많이 팔아서 상도 받았어요.” 아이들은 그 말을 듣고 교실이 떠나도록 웃었다. “어른들한테 배울 수 있는 게 또 없을까요?” “집이나 땅을 사고팔아서 돈 버는 거요.” “주식 투기하다 망하는 거요.” “아무 데서나 막말하고 시치미 떼고 거짓말하는 거요.” “성적이 떨어지면 윽박지르고 겁주는 거요.” “사람 차별하고 무시하는 거요.” “선생님, 똑똑한 어른들한테 배울 게 딱 한 가지 있어요.” “한 가지라? 몹시..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자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 행동과 표정에 자신의 짜증을 기어코 투사하여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인간을 마주했을 때의 황당함이 있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 자신은 실수하지 않으려는 것이고, 그 방법을 찾는다. 화가 나면 화가 사라질 때까지 무작정 걷는다는 이노이트족의 분노 해소법이 공유되는 것도, 기분 나쁜 상태로는 좋은 인간관계가 불가능해서다. 산책이나 명상이 현대인에게 치유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다. 그래서인지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자는 게 인간이라면 지녀야 할 보편적 덕목처럼 다루어지기도 하는데, 사람의 관계를 결정하는 사회적 위치가 지나치게 간과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든다. ‘누가’ 그게 더 가능한지를 따져 묻고, ‘누구냐에 따라’ 어떤 여파가 형성되는지를 묻는다면 특..
올봄부터 석탄화력발전소 하청노동자들을 만났다. 기후위기에 따른 ‘탈석탄’ 정책에 따라 이미 석탄발전소가 단계적으로 폐쇄되고 있는 중이었다. 보령, 울산, 호남발전소 일부가 폐쇄되면서 그곳에서 일하던 2차 하청노동자 58명 모두 해고됐다. 발전소 하청노동자와 몇몇 연구자들이 모여 발전소 폐쇄에 따른 고용위기 실태를 조사하기로 했다. 실태조사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해고된 노동자들을 좀처럼 만날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해고된 노동자 중 일부와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무작정 화를 내고 전화를 끊는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어렵사리 K와 연락이 닿았다. K는 발전소에서 8년간 일했다. 일하는 동안 7번의 업체가 바뀌었다. 1년에 한 번꼴로 재입사를 반복하는 동안 발전소 폐쇄 이야기를 알려준..
구치소에 수감된 외국인 A씨의 변호인 접견을 마치고 서류를 정리하면서 구치소 생활은 괜찮은지 물었다. 묻고 나서 속으로 아차 싶었다.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이긴 하지만, 잘못된 판단으로 범죄에 연루되어 먼 타국의 감옥에 갇혀 있는 삶이 괜찮을 리 없기 때문이다. 파키스탄 국적으로 한국어 대화가 서툴러 영어와 한국어 그리고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하는데, A씨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했다. 그러곤 잠시 망설이다, 배가 좀 고프다고 했다. 구치소에서 밥을 많이 안 주느냐고 물으니, 한국식이 아니면 한 끼에 빵 2개와 잼 1개를 받는다고 했다. 무슬림인 A씨는 종교적인 이유로 한국음식을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한국음식을 배식받으면 김치와 밥만 먹는데 그것도 양이 많지 않아 늘 배가 고프다고 했..
가끔 도시에 사는 아들 녀석한테 안부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 요즘 무슨 일 하세요? 땀 너무 많이 흘리지 마시고 쉬엄쉬엄하세요. 이웃들도 잘 지내시지요?” 내가 만일 도시에 살고 있었다면 아들 녀석이 어찌 이웃들 안부를 묻겠는가. 그리고 농촌을 오직 ‘관광 대상’으로 여겼을지 누가 알겠는가. 제11호 태풍 힌남노가 불어닥쳤을 때도 참으로 많은 분이 안부를 물어봐 주었다. 집과 농작물은 무사한지, 힘든 일은 없는지, 산골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잘 있는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관심을 갖고 물어봐 주었다. 이렇게 위로와 응원이 가득한 안부 전화를 받고 나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고, 없던 힘도 절로 생긴다. 더구나 “요즘 무슨 일 하세요” 하고 물어봐 주는 아들 녀석이 참으로 든든하고 고맙다...
집 앞에 새끼 고양이가 왔다. 평생 고양이를 만져본 적도 없지만, 모른 척하기엔 미안해서 급하게 물과 음식을 주니 잘 먹는다. 그 모습만으로도 울적한 기분이 잠시나마 사라졌다. 사진을 몇 장 찍어, 지친 일상에 고양이가 웃음을 준다는 글과 함께 공유했다. 그러자 밥그릇이 지저분하다, 오래된 물 같다는 등의 차가운 반응이 이어진다. 고양이를 있는 그대로 대해야지, 위로받기 위한 도구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훈계도 등장한다. 그런 말을 듣고자 한 말이 아니었는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강아지와 산책을 하다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개와 동네를 돌아다니는 이웃을 만났을 때도 그랬다. 요즈음 왜 보이지 않았냐고 물어서 며칠간 아이가 아팠고, 그러다 보니 업무가 밀려서 정신이 없었다며 근황을 전했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