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탐욕’이라는 것이 말이 될까 싶은데, 이 기이한 자질을 자본주의 시대 우아한 덕목으로 등극시킨 것은 막스 베버이다. 에서 자신의 삶에 유용한 자산 이상의 것을 근면하게 추구하는 것을 죄가 아니라,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적인 직업 윤리이자 신의 축복의 증좌임을 이야기했던 막스 베버 말이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나는 ‘성실한 탐욕’을 윤리적으로 승격시킨 베버의 면죄부에 대해 여전히 의심하고 있는 편이다. 거짓과 술수에 기반을 두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겨우, 자식에게 승계하는 것으로 끝내는 몇몇 자본가를 볼 때 특히 그러하다. 그런 걸 보면 누구에게나 공평무사하게 임하는 죽음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싶을 때도 있다. 죽음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보다 비대한 이윤들을 어디선가 ‘보이..
‘스마트안경점’은 망원우체국 사거리에 있는 적당한 규모의 안경점이다. 1991년부터 자리를 잡은 그곳에서 나뿐 아니라 성산동과 망원동의 아이들이 대부분 첫 안경을 맞췄다. 주인인 30대 남자는 언제나 친절했다. 시력검사를 하고, 테와 렌즈를 고르고, 시간이 걸려 안경이 완성되고 나면 그는 “자, 한 번 볼까” 하면서 손수 안경을 씌워주었다. 그때 볼의 약간 윗부분에 그의 손이 닿았다. 참 따뜻했다고, 나는 기억하고 있다. 스무 살이 되어 나는 망원동(성산동)을 떠났다. 그러고는 학교 때문에, 군대 때문에, 직장 때문에, 그 무엇 때문에 계속 멀어져 있었다. 한동안 안경점에 갈 일도 별로 없었다. 이전처럼 안경을 자주 부러뜨리지도 않았고 시력이 크게 변할 일도 없는 나이가 되었다. 직장 근처에는 ‘안경나라..
EBS의 에 출연 중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젠더토크쇼를 표방하는 는 지난 37회 동안 피임, 졸혼, 맘충, 군대, 데이트폭력, 낙태죄, 10대 성적 자기결정권, 성희롱, 꽃뱀, 냉동난자, 페미니스트 교사 등 다양하고 논쟁적인 주제들을 다루어 왔다. 덕분에 프로그램 자체는 심심찮게 폐쇄 요청에 시달렸고, 심지어 홈페이지가 해킹당해 ‘노알라(고 노무현 대통령의 얼굴과 코알라의 얼굴을 합성한 일베발(發) 이미지)’로 홍보 사진이 변경된 적도 있었다. 물론 출연진에 대한 공격과 신상털기는 일상에 가까워서, 한 출연자의 경우에는 직장에까지 항의와 민원이 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회보다도 38회(12월25일 방송)와 39회(내년 1월1일 방송)가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 성소수자 특집이기 때문이..
“한 해를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연말이면 이 같은 질문에 성실한 답변을 작성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빠진다. 개인적으로는 작년보다 나은 한 해였다. (이 또한 오래가지 않겠지만) 생애 가장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한철을 보냈고, 금융자본주의에 한쪽 무릎을 꿇은 뒤 (상대적) 주거안정성을 확보했으며, 사랑에 빠졌다…가 얼른 빠져나왔다. 수도승처럼 애욕, 집착, 번뇌에서 거리를 두고 살자고 다짐했다. 수도승 생활은 2년을 채우지 못했다. 일전의 연인들과 다른 환상을 보여주는 사람이 나타났고, 금세 매료되어버린 것이다. 자신의 좁은 세계에 침잠하며 끝없는 우물을 판 끝에 비대한 자의식의 글이나 영화를 선보이는 예술가형 인물과 만난 적이 많았고, 창작의 과정 동안 주변인을 감정적으로 학대하는 일을 보고 겪으며 환..
졸시 ‘디아스포라’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기자 양반, 근데 아리랑이 뭔 뜻인가요? 엊저녁부터 저 말이 머릿속에 딱 붙어 떠나지를 않더라고요 (피식) 뭐요, 확실치 않다고요? 그럼 내 처지랑 별반 다를 게 없잖아요 (피식) 그냥 밥이나 먹으렵니다 허, 싱겁네.” 이 시를 쓴 지 정확히 10년이 지난 2017년, 나는 아리랑 컨템퍼러리 시리즈 ‘아리랑X5’에 참여하게 되었다. 명창 이춘희, 현대무용가 안은미, 피아니스트 양방언, 기타리스트 함춘호가 앞선 네 차례 공연의 메가폰을 잡았다. 제목처럼 다섯 가지 새로운 아리랑을 선보이겠다는 것이다. 기자간담회를 할 때까지는 긴장이 되는 정도였는데, 네 차례 공연을 보고 나니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각자의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분들도 아리랑을 재해석하는 작업은 분명..
“아아~ 그거요? 죄송한데 못 갈 것 같아요.” 나도 모르게 수화기를 내려놓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벌써 세 명째다. 미안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해맑은 목소리로 아무렇지도 않게 취소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이제 놀랍지도 않다. 당장 다음주에 강의가 시작하니 새로 신청받기도 어려운 상황, 40명이 넘는 신청자에 기분이 좋아 ‘강의실이 너무 좁으면 어쩌지’ 걱정한 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진다. 리스트에는 신청자들이 적어놓은 강의 신청 이유들이 다양하게 적혀 있다. ‘좋은 강의 꼭 듣고 싶습니다’ ‘너무 기대됩니다’ ‘다른 강의도 너무 듣고 싶어요’ 등 읽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는데, 막상 통화를 해보니 아예 자신이 신청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것 같으니 힘이 빠질 수밖에. 사실 통화하기 전에 문자도 보냈다..
한 국가의 고용률은 그 나라에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과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서로의 땀방울을 존중하며 연대의 환희를 나눌 수 있는지 말해주지 못한다. 한 국가의 1인당 국민소득 수준은, 그 나라의 이주자, 장애인 그리고 성소수자들이 얼마나 혐오와 폭력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서로가 자유롭게 친구가 될 수 있는지 말해주지 못한다. 한 국가의 국민총생산은, 노인과 젊은이가, 병든 사람과 건강한 사람이, 그리고 서로가 평등한 여성과 남성이 한데 어울려 얼마나 신비롭고 장대한 직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결코 말해주지 못한다. 한 국가의 부의 수준은, 무엇보다 그 나라의 산과 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푸르며, 어린이들은 그 위를 얼마나 마음껏 뛰놀 수 있는지 하나도 말해주지 못한다. 한국은 경제수준을 세계 10..
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 보내는 시절에는 잘 몰랐다. 사람들이 ‘보통 인간’에게 기대하는 바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는 것을. 그리고 보수적이라는 것을. 나이 들어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나는 ‘이쪽’ 세상이 책에 펼쳐진 ‘저쪽’ 세상과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 가끔 혼자서 놀라고는 한다. 무슨 일을 하는지, 결혼을 했는지, 아이는 몇인지, 연령에 따라 조금 달라지긴 하지만 마찬가지이다. 타인들의 질문은 조심스럽지만, 그 조심스러움에는 응당 그러해야 마땅하다는 완강한 의식이 묻어 있다. 그 완강한 의식을 은 석기시대부터 지속된 인간의 보수성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은 2016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데, 작가 무라타 사야키는 실제로 18년 동안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글을 썼다고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