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선출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수락 연설에서 가장 눈길을 끈 단어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약탈’이었다. 원문을 보자. “문재인 정권의 소득주도성장과 부동산 폭등은 ‘재산 약탈’입니다. 악성 포퓰리즘은 ‘세금 약탈’입니다. 1000조가 넘는 국가채무는 ‘미래 약탈’입니다.” 연설의 결론은 “ ‘약탈의 대한민국’에서 ‘공정의 대한민국’으로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연설에서 약탈이라는 단어는 여덟 번이나 등장했다. 약탈은 그의 일관된 문제의식인 것으로 보인다. 6월29일 출마선언에서도 “부패하고 무능한 세력의 집권 연장과 국민 약탈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고, 최근에는 대장동 특혜개발 의혹과 관련해 “이재명 패밀리의 국민 약탈”을 막겠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약탈이라는 단어는 우연히 쓰인..
19세기 사회사상가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던 역사 인식을 꼽으라면 사회진화론을 들 수 있다. 사회가 발전하는 길은 하나밖에 없고, 이 길에는 몇 개의 단계가 있으며, 서로 다른 사회들은 그 정해진 길을 빨리 가느냐 늦게 가느냐의 속도 차이밖에 없다는 사고방식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는 카를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이다. 모든 사회는 정해진 단계들을 거쳐 봉건제와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고 공산주의를 향해 나아간다. 의 서문에서 마르크스는 독일의 노동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 속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조만간 독일도 정해진 길을 따라 영국과 똑같아질 것이라는 예언이다. 단계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르지만 정해진 단계를 통해 정해진 길을 간다는 사고방식은 마르크스 말고도 폭넓게 공..
카불 공항을 이륙하는 미군기에 사람이 매달렸다 추락하는 참혹한 장면은 2001년 9·11 테러 때 쌍둥이 빌딩에서 사람이 추락하던 장면과 겹쳐지면서 소위 ‘9·11 시대’의 시작과 끝이 이리도 잔인한 수미일관을 이루는지 몸서리를 치게 했다. 하지만 미군의 아프간 철수는 이미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결정한 것이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때 협상을 거쳐 조 바이든 행정부가 실행에 옮긴 것이어서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다. 비록 철수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다는 오점을 남기기는 했으나 미국의 오랜 전략적 고민의 결과이다. 20년 만에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탈레반 정권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은 착잡하다. 일단은 탈레반이 과연 약속대로 종교적 극단주의를 강요하지 않고 여성을 비롯해 인권을 보장할 것인지 여부를 지켜보..
“이론적으로는 이론과 현실은 같은 거야. 아, 물론 현실적으로는 다르지.” 이론과 현실의 차이에 대한 유명한 농담이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해서일까. 이미 15년 전에 94세로 세상을 떠난 미국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2021년 한국에서 뜬금없는 고생을 하고 있다. 그것도 양쪽에서. 일단 한쪽부터 보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부친이 선물한 밀턴 프리드먼의 저서 를 읽고 감명을 받았고, 그것이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그의 신념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책의 1장은 ‘시장의 힘’이고 2장은 ‘규제의 폭압’이다. 편의점 최저임금이나 부동산, 대기업 구내식당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개입하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은 ‘규제의 폭압’으로 읽혔을 것이고, 그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해야겠다는 신..
미국 밀레니얼의 42%는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를 선호한다고 말하지만,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는 밀레니얼은 16%밖에 없다. 기성세대에게는 앞뒤가 안 맞는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에 있는 케이토 연구소의 여론조사 책임자인 에밀리 에킨스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인터넷이라는 풍요의 화수분 속에서 자란 사람들이다. 150개의 케이블 채널과 성적 정체성을 분류하는 50가지 방법, 그리고 31가지 종류의 아이스크림에 익숙하다. 그들이 어떻게 두 개의 정당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기성세대의 눈에 앞뒤가 맞지 않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사람들의 태도를 분류하는 축이 부족해서일 수 있다. 이대남은 정치적으로 보수화했다고들 한다. 가로축에 연령, 세로축에 보수성향을 놓고 그림을 그리면 U자 형태가 나타난..
공정이 새로운 시대정신이 되었다고들 한다. 이재명의 ‘성장과 공정’, 윤석열의 ‘공정과 상식’, 유승민의 ‘공정 소득’에 이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공정한 경쟁’에 이르기까지 공정 담론이 넘쳐난다. 이제 공정의 뜻을 한번 되새겨볼 때가 되었다. 대니얼 카너먼은 심리학자이지만 행동경제학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그 공로로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특히 그는 공정이라는 관념이 시장에서의 경쟁을 어떻게 촉진하거나 왜곡하는지를 집중적으로 설명했다. 공정한 경쟁을 주장하는 ‘이준석 현상’을 이해하는 열쇠 말이 될 수도 있다. 첫째, 준거의 정치학이다. 공정한지 아닌지는 비교의 기준, 즉 준거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86세대는 사회를 지배자와 피지배자, 독재자와 민중, 제국과 식민지, 자본..
지난 몇 년간 기본소득은 정치권에서 조금씩 그 자리를 넓혀왔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선두에 서있고,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도 한때 기본소득을 띄웠다.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신복지’ 정책이나 정세균 전 국무총리의 ‘돌봄사회’ 정책도 모두 기본소득이라는 유혹으로부터 파생되었거나 이 지사가 선점한 기본소득 정책에 대한 맞대응 차원에 서있다. 이 모든 제안들의 공통점은 현금성 복지라는 점이다. 기본소득이 탄력을 받게 된 것은 물론 코로나19라는 배경 때문이다. 긴급재난지원금의 경험은 다른 현금성 복지라고 해서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을 널리 퍼뜨렸다. 그러면 기본소득은 다가오는 대선의 핵심 의제가 될 수 있을까. 각당의 대선 후보가 정해지고 양강 후보 간의 맞대결이 본격화되면 지금까지와는 상당히 다..
2030세대의 사고방식이 기성세대와 크게 다르다는 점, 그리고 그들 내부에서도 젠더 간 차이가 매우 크다는 점은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이번 보궐선거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예를 들어 오세훈 후보에게 투표한 20대 남성은 여성에 비해 31.6%포인트나 많았다. 60세 이상 유권자에서의 격차에 비해 10배가 넘는다고 한다. 나는 3년 전 이 칼럼을 통해 젠더정치의 등장을 분석한 적이 있었는데(2018년 3월12일자), 그 이후에 몇몇 정치권 인사들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지만 똑 부러지는 답을 주지는 못했다. 사안의 성격상 양쪽의 마음을 동시에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는데도 막상 선거를 통해 다시 한번 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