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합을 겨루어도 승부가 나지 않는, 날카로운 인파이터 추미애 법무장관과 건들건들 아웃파이터 윤석열 검찰총장 간 싸움을 지켜보는 일은 참 힘들었다. 싸움이 길어지면 왜 싸우게 되었는가는 사라져버리기 마련이라고 하는데 추미애와 윤석열의 싸움이 그랬다. 무림 고수들의 현란한 싸움 기술과 그들이 속한 문파가 어디인가라는 것만 남았다. 그들이 창과 방패로 찾아낸 법과 제도는 매번 의표를 찌르는 것이었으나 그것들은 벌거벗은 싸움의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싸움판에서 검찰개혁이라는 문제의 본질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박범계 장관이 법무부를 맡고 윤석열 검찰총장과 몇 차례 수작을 주고받더니 서초동 주변이 조금 소강 상태인 것 같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평화인 것은 분명하나 다..
정치, 검찰, 법원, 각 영역의 진정한 소명은 무엇인가? 최근 장혜영 의원, 윤석열 검찰총장과 김명수 대법원장을 둘러싼 논쟁을 보면서 언뜻 스쳐가는 질문이다. 장 의원은 이번에 피해자의 존엄 보호 및 공동체적 성찰과 해결을 제기했다. 그런데 고통을 겪는 구체적 인간에 대한 공감능력이 항상 고장났던 일부 관념적 평론가들은 엉뚱하게 사법처리를 강요한다. 이에 대해서는 깊은 공부와 예리한 비평의 정희진과 홍성수 칼럼(경향신문 2월10일자)이 새로운 교과서가 될 만하다. 내가 첨언하고 싶은 부록은 이번 장 의원의 화두가 정치와 검찰, 법원 영역이 원래의 정신과 소명을 복원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바로 인간 존엄 가치에 기초한 공동체의 통합적(Holistic) 문제해결 말이다. 이 점에서 미국은 이..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의 해고 기간은 35년, 정년을 맞는 올해 36년차에 접어든다. 그 해고를 청산하기 위해 34일 동안 부산에서 서울까지 걸어왔다. 목적지는 청와대.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다. 왜 한 노동자의 해고 청산에 대통령이 나와야 하는가. 그의 해고에 국가폭력이 개입해 있어서다. 그의 복직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역사적 과제다. 사측이 밝힌 김진숙의 해고사유는 무단결근. 무단결근의 이유는 대공분실에 무단으로 잡혀갔기 때문이다. 잡혀간 이유는 어용노조를 비판하는 홍보물을 뿌리고 노동조합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1986년 독재정권 말기였다. 김진숙이 고문을 받았던 곳에서 대학생들이 죽어 나왔다. 영도조선소 앞에 살았던 서울대생 박종철도 그중 한 사람. 민주화가 되자 함께 싸웠던..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은 ‘시장의 우상’은 언어와 명칭이 결합해 지성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으로, 언어는 지성에 폭력을 가하고 모든 것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인간으로 하여금 공허한 논쟁이나 일삼게 하고 수많은 오류를 범하게 한다고 갈파한 바 있다. 지난 1일 미얀마에서 군사쿠데타가 발생해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을 구금했다는 외신의 속보가 있었다. 1988년에 귀국한 후 이듬해 군사정권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했지만, 비폭력저항을 이끌어 199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마침내 2010년 말 20년 만에 총선이 실시되면서 석방되었던 아웅산 수지는 한때 미얀마 민주화의 영웅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집권 이후 아웅산 수지는 민주주의나 인권 존중과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였다. 한때 인권유린을 자행한 군사정부와 ..
나는 경기도민이다. 동네 네거리에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1인당 10만원 지급” 현수막이 걸려 있다. 돈을 준다니 반겨야겠지만 마음은 불편하다. 코로나19 재난에 대응한다면서 굳이 모두에게 주어야 할까. 모든 국민이 코로나19로 불편한 일상을 겪고 있지만 경제적 타격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미 K자 양극화가 확연하다. 코로나19에도 디지털·플랫폼 업종은 호황을 누리고, 일부 집 가진 사람과 주식투자자들은 가격 상승에 들떠 있다. 안정적 기업에서 일하는 종사자 역시 재택근무가 익숙하지 않을 뿐 경제적 어려움은 없다. 반면 영업을 못하거나 소득이 급감해 하루하루가 막막한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제는 국회 앞에서 “얼마 전 유서를 작성했습니다”라며 자영업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행정은 권력을 위임받은 ..
지난 한 달여간 재난지원금을 두고 벌어진 논쟁은 여러 면에서 당혹스러웠다. 정책에 대한 토론이 필요한 이유는 국민이 필요로 하는 것을 잘 파악하고 적절한 방법을 강구하여 국민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번 논쟁에서는 보다 나은 결론을 이끌어내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여 승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자기가 하고 싶거나 자기에게 유리한 주장만을 펼쳐나간 데 있다. 재난지원금의 보편 지급이나 영업 손실의 충분한 보상을 주장한 사람들은 재원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의 재정이 비교적 충분하여 한동안 그렇게 지출만 해도 괜찮다면, 그렇다는 판단을 밝히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생..
소년원 출신. 이건 낙인 아니면 철없는 훈장이다. 소년원 출신이라면 골목에서 놀기 편할 수도 있다. 남다른 경험을 했다며 어깨에 힘을 줄 수 있다. 그래 봤자 잠깐, 철없는 시절의 골목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소년원 출신이라는 건 대개 낙인이다. 소년원은 “소년이 건전하게 성장하도록 돕는”(‘소년법’ 제1조) 곳이다. 소년의 잘못은 소년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부모의 잘못이고 교사 등 어른들의 책임이기도 하다. 아직 성장 중이니 기회를 주자는 뜻도 있다. 비행 때문에 소년원에 간다지만, 같은 비행을 저질러도 가난하거나 한부모 또는 조손 가정 아이라면 소년원에 갈 확률이 엄청나게 높다. 그러니 일반적인 형사처분과는 다른 ‘특별한 조치’가 필요한 거다. 2년 동안 소년원에 가..
한 사람은 작년에 암 선고를 받았지만 치료를 중단한 채 겨울의 산하를 걷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은 30일 넘게 시멘트 바닥에서 단식투쟁을 하고 있다. 둘 다 장년의 나이다. 좀 알려진 대로 이들의 요구는 단지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의 복직과 명예회복이 아니며, 단지 한진중공업 노사 간의 문제도 아니다. 2007년에 나온 김진숙의 산문집 (후마니타스)를 처음 읽었을 때의 전율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책은 1960년 강화에서 태어난 시골 소녀가 어떻게 부산 영도까지 가서 거대 조선소의 용접공이 되었고 또 왜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는지? 왜 그 생애의 3분의 2나 되는 시간을 어렵고 외로운 싸움에 바쳐야 했는지를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민주노조운동의 현장에서 만난 운동가들, 그리고 그가 집회 현장이나 ‘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