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동네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석했다.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왔나 둘러보는데 군수가 눈에 들어왔다. 오, 군수도 토론회에 참여하는구나,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간단한 인사말이 끝나고 토론회가 시작할 무렵 군수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자리를 뜨는 군수 때문에 참석자들은 미리 사진을 찍으러 우르르 무대 앞으로 나와야 했다. 무슨 바쁜 일정이 있었나 싶어 군청 홈페이지에서 일정을 찾아보니 토론회 참석은 공식 일정이 아니었고 다음 일정은 몇 시간 뒤였다. 식량위기 시대에 먹거리 기본권을 보장할 방법을 찾는 중요한 토론회가 왜 공식일정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공식일정이 아님에도 참석한 것을 감사해야 할까, 아니면 뒷일정이 나중인데도 먼저 자리를 뜬 걸 질타해야 할까. 왜 우리는 이런 풍경을 익숙하게 받아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일 오전 서울광장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에서 닷새째 조문을 하기 위해 조화를 들고 이동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조문하고, 조문하고, 조문하고, 조문하고, 조문하고, 조문했다. 추모법회, 추모예배, 추모미사에 갔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태원 핼러윈 참사’ 발생 후 1주일 동안 한 일이다. 대통령은 조문객에 머물 수 없다. 흰 국화를 바치고, 법회와 예배에서 손 모으는 일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 이를 반복하는 건 정치도 통치도 아니다. 시민이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것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국정책임자로서의 진솔한 사과다. 윤 대통령은 7일 국가안전시스템 점검회의를 주재하며 “비통하고 마음이 무겁다.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시민은 대통령의 ‘마음’이 아니라 ‘..
156명의 생명이 스러진 이태원 핼러윈 참사의 ‘국가애도기간’이 지난 5일 끝났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님을 우리 모두는 안다. 윤석열 대통령은 참사 다음날인 지난달 30일 대국민담화를 통해 5일까지를 ‘국가애도기간’으로 선포하고 “사고 수습 및 후속 조치에 국정의 최우선 순위를 두겠다”고 했다. 국가애도기간에 윤 대통령은 매일 희생자 분향소를 찾았다. 출근길 문답은 하지 않았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국가애도기간은 말보다는 고개를 숙이는 애도의 시간이 돼야 한다는 것이 대통령의 뜻”이라고 했다. 참사 사흘 만인 지난 1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과 윤희근 경찰청장 등 관계기관 수장들이 공식 사과했다. 경찰의 112신고 접수 녹취록 공개로 정부의 부실 대응이 뚜렷이 드러난 날이다. 윤 대통령의 사과 메시지는 ..
이태원의 좁디좁은 골목에서 150명이 넘는 소중한 생명이 허망한 죽음을 맞은 다음날 아침. 국민의 안전을 총책임지고 있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말은 귀를 의심케 했다.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였던 것은 아니었다. 경찰이나 소방인력을 미리 배치해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다.” 당장 머리 숙여 사죄를 해도 모자랄 판에 희생자들과 유족, 국민들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책임 회피였다. 정부는 5일까지를 ‘국가애도기간’으로 정해 정쟁을 멈추자고 하면서 이번 참사를 ‘사고’로, 희생자를 ‘사망자’로 표기하는 지침을 내놓았다. 참사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하기보다 자신들에게 미칠 후폭풍을 막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정부는 참사를 막지 못한 제도적 한계도 주장하고 나섰..
이태원 핼러윈 참사 소식을 접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이랬다. 죽음을 정쟁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 당분간 애도기간을 갖자는 여권 인사들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없이 생을 마감한 희생자와 가족들의 상실감, 사회를 짓누르는 슬픔의 공기를 생각하면 조용히 명복을 비는 것이 도리라고 여겼다. “이태원 참사는 청와대 이전 때문에 일어난 인재”라는 민주연구원 부원장이나, 세월호 사태에 빗대려는 일각의 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여겼다. 치유되지 않은 세월호를 정치적 의도로 헤집는 데 동의할 수 없었다. 난잡한 정치판에도 금도는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경찰 녹취록이 사고 3일 만에 공개되면서 국면이 바뀌었다. 녹취록에 따르면 사고 발생 약 4시간 전부터 “난리가 났다” “압사당할 것 같다”는 112신고가 ..
세상은 온통 이태원 참사로 슬픔에 잠겨 있지만, 국방부와 군은 열흘 전 일로 침잠해 있다. 서욱 전 국방부 장관의 구속이 남긴 충격파가 작지 않아서다. 서 전 장관의 구속이 왜 군을 충격에 빠뜨렸는지, 몇개의 장면을 통해 되짚어보자.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두 달이 되어가던 지난 7월7일, 합동참모본부는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대응 과정에서 군이 군사정보통합처리체계(MIMS·밈스)의 첩보를 삭제했다는 KBS의 보도를 반박했다. 불법 삭제가 아니라 불필요한 첩보의 열람을 막기 위해 배포선을 조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군의 이런 주장은 결국 무시됐다. 정부는 국가정보원과 검찰, 감사원을 총동원해 수사한 끝에 지난달 22일 서 전 장관과 김홍희 전 해양경찰청장을 구속했다. ‘윤석열 정부의 군’의 ..
벌써 세 번째이다. 보수 정부에서 위험이 핵심적인 사회현상으로 등장하는 것 말이다. 박정희, 노태우, 김영삼 정부 때에도 위험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지만 지금과는 양상이 달랐다. 노동현장에서 일어나던 수많은 사고는 회유 혹은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취약한 사회 인프라로 인한 일상의 위험은 숙명처럼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명박 정부 때의 광우병 사태와 4대강 사업, 박근혜 정부 때의 세월호 참사, 그리고 윤석열 정부 들어 일어난 이태원 참사는 이제 고질화해가는 보수 정부의 패턴처럼 느껴져서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 이명박 정부는 위험의 사회화와 그 반작용으로서의 위험의 정치화를 최초로 경험했다. 이익을 보는 집단은 분명한데 그에 따르는 위험은 불특정 다수에게로 분산시켜버릴 때,..
영국 정치가 수상하다. 지난 20일 리즈 트러스 총리가 취임 44일 만에 사임하고 25일 리시 수낵 신임 총리가 취임했다. 수낵 총리는 인도계 이주민 3세로 영국 역사상 최초의 비백인 출신 총리라는 점에서 주목받는 대상이 됐다. 트러스 전 총리도 영국 역사상 최초의 40대 여성 총리로서 30대 중반부터 12년에 걸쳐 환경장관, 재무차관, 교육장관, 국제통상장관, 법무장관, 외무장관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커다란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트러스 전 총리는 영국 역사상 최단기 총리에다 정책 실패로 인한 사임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2016년 브렉시트 문제로 물러난 캐머런 총리 이후 6년 동안 다섯 번째 총리 교체가 이어져 ‘총리 재임 기간이 양상추 유통기한보다 짧다’는 농담을 현실화한 인물로 거론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