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뭘? 뭘 어쨌다고? 같이 사는 처지에, 아니 그 정도 말도 못한단 말인가? 예전에는 더 심한 말도 했는데…. 정용은 혼자 따져보다가 기분이 더 상해버렸다. 가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지. 내가 뭐 아쉬운 게 있다고…. 정용은 그렇게 진만이 나간 방문을 바라보다가 마음의 문마저 휙 닫아버렸다. 시작은 사소한 말 한마디부터였다. 편의점 야간 알바를 마치고 돌아온 정용이 켜져 있는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안 쓸 땐 쫌!’ 하고 짜증을 냈다.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진만은 ‘왔냐?’ 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 컴퓨터는 정용의 것이었고, 진만이 누워 있는 침대도 정용의 자리였다. 진만은 평소 침대 아래에 삼단요를 깔고 잤다. 가뜩이나 컴퓨터 쿨러 상태가..
진만은 한 생활폐기물업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예전 택배 아르바이트를 함께하던 성구 형이 그쪽 업체 반장을 맡고 있었는데, 진만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준 것이다. “간단해. 그냥 아무도 살지 않는 시골집에 가서 세간 살림 빼고 정리해주고 오면 끝.” 일당은 다른 아르바이트보다 높았다. 가고 오는 시간까지 계산한 것이라고 했다. “좋잖아. 그래도 봄인데 시골로 나들이 가는 거 같고.” 그러고 보니 어느새 목련꽃들이 삶은 달걀처럼 빼곡히 허공에 매달려 있는 계절이 와 있었다. 진만이 성구 형과 그날 처음 보는 박씨라는 사람과 함께 1t 트럭을 타고 도착한 곳은 광역시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면 소재지였다. 오래된 구옥 20여채가 모여 있는 작은 동네였다. 동네 앞으론 아직 녹지 않은 눈이 희끗희끗..
올 것이 오고 말았구나. 정용은 원룸 주인과 통화를 마치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긴 오래 버티기도 버텼지. 다음달 계약 만료를 앞두고 받은 전화였다. 그동안 정용과 진만은 보증금 없이 월세 30만원만 내고 원룸에 거주했다. 그 세월이 삼 년이었다. 반지하였고, 지하철역까지 걸어서 20분 가까이 걸리는 집이었지만, 정용과 진만은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욕실 샤워기 수압도 문제없었고, 도시가스도 아무 이상 없었으니까. 그러면 됐다. 삼 년 동안 월세 한 번 올리지 않는 집주인을 만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월세는 그대로 두고 새로 보증금만 500만원을 더 받겠다고 했다. 집주인은 그러면서 정말 미안해했는데, 하나뿐인 아들이 갑자기 정리해고를 당해 어떻게 치킨집이라도 차려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는 말을..
자정 무렵 진만은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자정이라면 아버지가 아파트 경비초소에서 야간 취침에 들어야 할 시간이었다. 아버지의 음성은 조금 가라앉아 있었지만 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너한테 할 말은 아니지만… 이걸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말이다….” 아버지는 느릿느릿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오피스텔 야간경비를 그만두고 인근 대단지 아파트로 직장을 옮긴 것은 올해 봄의 일이었다. 오피스텔보다 근무환경이 더 낫다고 해서 (오피스텔은 취침할 만한 곳이 여의치 않아 늘 책상에 엎드려 자야만 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출근했는데,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고 한다. 계약 시 근무 기간이 6개월로 정해져 있었다는 것. 아버지가 그 부분을 염려하자 용역회사 부장이라는 사람이 귀찮다는 듯 툭 말을 건넸다고 한..
“넌… 날 어떻게 생각해?”진만이 유정에게 물었다.“뭘 어떻게 생각해?”유정은 반찬으로 나온 양념게장을 우물거리면서 진만을 바라보았다.“그게… 왜 우리… 예전엔 좀 그랬잖아….”진만은 유정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물컵을 들어 올렸다. 귓불에서 맥박이 뛰는 게 느껴졌다. 귓불아, 나대지 마라. 괜찮다, 괜찮아…. “뭘 그랬다고 그래, 우리가?”유정이 밥주발 뚜껑에 앙상한 게 껍데기를 올려놓으며 물었다.“왜 학교 다닐 때 같이 밥도 먹고… 도서관도 가고… 자취방까지 내가 바래다주기도 하고 그랬잖아….”진만은 그 말을 하고 나서 목까지 홧홧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어려운 고백을 이제 막 마친 기분이었다.카드회사에서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 40만원이 충전되었다는 메시지를 받자마자 진만이 처음 머릿속에 떠..
그날, 진만은 PC방에 있었다.게임을 하러 간 것은 아니었고, 이런저런 구인 사이트를 둘러보기 위해 간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론 그냥 게임만 하고 말았다. 일자리는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고, 있다고 해도 대부분 영업직이나 경력직뿐이었다. 십 분이나 둘러봤을까, 진만은 그냥 롤에 접속하고 말았다. PC방엔 의외로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젊은 남자들이었는데, 서너 명씩 같이 온 일행으로 보였다. 몇몇은 대학생인 듯 온라인 강의 창을 열어둔 채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야, 이러면서 게임하니까 뭔가 졸라 보람찬 일을 하는 거 같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친구들이 낄낄거리면서 “너, 조심해라, 그러다가 인생 최초로 A+ 받을라?” 되받아치기도 했다. 전염병이 돌든 실직자가 늘든 밖에 비가 내리든 말든..
남자는 흰 와이셔츠에 슈트 차림이었다. 넥타이를 매진 않았지만 가죽 재질로 된 백팩을 메고 있었고, 구두도 깨끗했다. 회사에서 막 야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같았다. 머리카락은 짧았고, 햇빛 한번 쐬지 못한 사람처럼 피부가 희멀겋다. 남자는 한참 동안 편의점 매장 이곳저곳을 둘러보더니 캔 커피 하나를 골라 카운터에 내밀었다. 정용은 남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포스기를 찍었다.“이거 원 플러스 원인데요. 하나 더 가져오셔도….”남자는 정용의 말에 다시 느리게 캔 커피 하나를 더 가져왔다.“이건 그쪽이 드세요.”정용은 남자가 내미는 캔 커피를 받고 작은 목소리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했다. 남자는 편의점 내 테이블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면서 캔 커피를 마셨다.정용은 캔 커피를 무연히 바라보았다. 입맛이..
진만은 며칠째 자취방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빈둥거리며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해보았는데, 그러다가 뭐 미래만 아니면 나쁠 것도 없겠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언제나 미래가 문제였지, 미래라는 것들 때문에 열 받았지. 망할 미래 같으니라고.곰곰이 따져보니, 진만은 ‘미래’라는 이름 자체와도 좋지 않은 기억뿐이었다. 그것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마찬가지였다.실제로 진만의 고등학교 동창 중엔 ‘미래’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도 있었다. 진만이 살던 도시에서 꽤 유명했던 ‘미래내과의원’ 원장의 첫째아들인 ‘최미래’. 나중에 병원을 물려줄 생각으로 아버지가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는데, 그 덕분이었는지 몰라도 미래는 공부를 꽤 잘했다. 선생님들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뭐 나중에 병원을 물려받으려면 어쩔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