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만은 자취방으로 돌아오다가 한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삼십대 초반쯤 되어 보였는데, 검은색 항공 점퍼에 색 바랜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가르마를 타지 않고 얌전히 아래로 내린 머리카락은 눈썹을 다 가리고 있었고, 입술 바로 위쪽엔 무언가에 베인 듯한 상처가 나 있었다. 전체적으로 마른 체형이었고, 키도 그리 크지 않았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하얀색 손수건을 손목에 마치 팔찌처럼 묶고 있었다는 점이다. 남자가 담배를 피우거나 휴대폰을 귀에 댈 때 그 손수건이 도드라져 보였다. 진만은 그 남자 이야기를 정용에게 꺼냈다.“좀 이상하더라고…. 인상도 안 좋고.”“뭐 볼일이 있나 보지. 우리 동네에 사람이 좀 많이 사냐?”정용은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프로야구 하이라이트를 보면서 말했다. 그 말이 맞긴 했다. 원룸촌..
“여기가 맞는 거 같은데…?” 진만은 손에 든 메모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광역시 외곽에 있는 아파트 단지 정문 앞이었다. 정문 바로 옆에는 ‘하나로 마트’가 있고, ‘LH세탁소’가 있었다. 그 외 다른 상가는 모두 문이 닫혀 있었다. “512동이라며? 바로 저기 있네, 뭐.” 정용이 턱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정문 경비실 뒤편, 아직 잎이 돋아나지 않은 플라타너스 가지 사이로 마치 오래된 교과서의 겉표지에 적혀 있는 듯한 숫자 ‘5’와 ‘1’과 ‘2’가 보였다. 가로등이 깜빡깜빡 수선을 피우며 들어오고 있었다. 진만과 정용은 512동 3, 4라인 입구 계단에 앉았다. “얼굴도 모르고 핸폰 번호도 모른다는 거지?” 정용이 묻자, 진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구 계단 옆 화단에는 개나리꽃이 한창이었다. 개나..
1. 첫째 날 - 카톡 진만: 성희씨, 잘 들어가셨나요? 전 지금 들어왔어요. 오후 8:42 성희: 어머, 제가 너무 늦게 봤네요. 네, 저도 잘 들어왔어요. 고마워요. 전 빈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 이렇게 다시 연락을 주셨네요. 오후 10:12 진만: 아니에요! 늦긴요!! 전 또 무슨 일 있으신 줄 알고... 제가 더 고맙죠. 이렇게 답신도 해주시고... 전 정말 오늘 성희씨 만나고 와서 너무 좋았거든요. 진짜 무슨 인연을 만난 거 같고... 오후 10:13 성희: 저도요. 저도 아까 거리에서 처음 진만씨 봤을 때... 그때 퇴근하던 길이었죠? 오후 10:18 진만: 네, 알바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마을버스 기다리고 있을 때 성희씨가 말을 건 거예요. 오후 10:18 성희: 네, 제가 아..
자취방 뒤쪽으로 재개발을 하다가 수년째 방치된 야트막한 야산이 있었다. 정용은 그곳을 오르다가 평소엔 보지 못했던 커다란 바위 하나가 길 한가운데를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바위는 리어카 크기만 했는데, 절반쯤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이 밖으로 나왔는지 아랫부분이 검고 축축한 모습이었다. 이게 왜 여기 나와 있지?정용은 바위 둘레를 돌아보며 괜스레 발뒤꿈치로 툭툭 윗부분을 쳐보았다. 윗부분은 제법 평평해 보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누군가 정 같은 것으로 계속 내리친 듯 모나고 깨진 흔적이 많았다. 그 길은 정용이 아주 가끔 마을버스 대신 걸어서 알바하는 편의점까지 가는, 말하자면 지름길이었다. 평상시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고, 구청이나 다른 기관에서도 관리하지 않는 듯 산을 관통하는 작..
오후 3시까지 상하차 알바를 끝내고 자취방으로 돌아온 진만은 곧장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뜬 시간은 밤 10시. 함께 사는 정용은 편의점 알바를 나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진만은 라면을 끓여 먹을까 하다가, 추리닝 바지에 점퍼만 대충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김밥천국에 갈 작정이었다. 월급을 받은 날이니까, 오랜만에 ‘스페셜 정식’을 먹을 생각이었다. 경양식 돈가스에 원조김밥이 함께 나오는 ‘스페셜 정식’은 팔천원이었다. 진만은 정용과 함께 일주일에 두세 번씩 김밥천국에서 끼니를 때우곤 했는데, 그때는 늘 짬뽕라면에 원조김밥, 떡라면에 공깃밥 하는 식이었다. 가격은 육천오백원. ‘스페셜 정식’과는 불과 천오백원 차이였지만, 그래도 주문은 늘 그렇게 했다. 그래도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진만은 마음이 가벼..
정신적으로…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진만은 욕실 거울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건 뭐 너무 예민하잖아. 욕실문 밖에선 계속 달그락, 달그락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수저와 그릇이 서로 부딪치면서 내는 소리가 마치 알 굵은 우박이 슬레이트 지붕 위로 쏟아지는 것처럼 요란했다. 정용은 왜 저렇게 쉽게 화를 내는가? 저것도 병은 아닐까? 진만은 쉽게 욕실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정용은 원래 그런 친구가 아니었다. 말이 좀 없어서 그렇지, 요즘처럼 벌컥 화를 내거나 계속 미간을 웅크리고 다니는 친구는 아니었다. 정용이 편의점 알바를 하는 시간에, 진만은 종종 그곳 테이블에 앉아 폐기등록 된 삼각김밥을 얻어먹곤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정용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는데, 그때도 정용은 뭐랄까, 마치..
“알바하다 보면요, 진짜 이상한 사장들, 황당한 점장들 많이 만나잖아요.” “그야, 그렇죠…. 한데 어디 그게 사장들만 그런가요? 같이 일하는 알바 중에도 이상한 애들이 진짜 많아서….” “진만씨는 아직… 괜찮죠?” “네? 뭐가요?” “아니, 우리 사장한테 이상한 말 안 들었냐고요?” “이상한 말이요? 아니오, 저는 아직….” “그런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지금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저기 나중에 하면 안될까요?” “잠깐이면 돼요. 이게 진짜 중요한 이야기거든요.” “제가 버스를 놓치면 걸어가야 하는데….” “우리 사장이 겉만 보면 진짜 멀쩡하잖아요. 숯불갈비집 사장 같지 않고 카운터에 와이셔츠 입고 앉아서 책이나 보고…. 나는요, 맨 처음에 우리 사장이 부모 잘 만나서 가게 물려받은 사람이..
정용은 대학교 2년 선배인 철민의 전화를 받았다. “너, 송 교수님 알지? 송 교수님이 이번에 정년퇴임하시잖니.” 철민 선배의 말인즉슨, 학과 동문회에서 송 교수의 정년퇴임식을 광역시에 있는 한 호텔 연회장에서 열기로 했는데, 시간 괜찮으면 꼭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제가요? 제가 그런 자리에 왜….” 정용은 말꼬리를 흐렸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자기 뜻을 전했다고 생각했다. 원래 그런 자리는 성공한 제자들이나 참석하는 행사가 아니던가. 화환도 보내고, 꽃다발도 들고 가고, 지인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처럼 봉투에 돈도 넣고…. 직업이라곤 택배 상하차 알바와 편의점 알바를 전전하고 있는 처지인데…사촌여동생 결혼식도 부조금이 없어서 못 갔는데…. “그냥 머릿수만 채우면 되는 거야. 그런 행사는 다른 거 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