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 회사에 입사를 한 지 한 달 만에 진만은 사표를 내고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뭐야, 잘린 거야?”편의점에서 퇴근하고 돌아온 정용은 진만을 보자마자 바로 그 말부터 했다. 진만은 양말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어쩐지 몸이 조금 홀쭉해 보였다. 얼굴은 거무튀튀하게 변해 있었다.“아니야. 내가 스스로 관둔 거야.”진만은 몸을 반쯤 일으켰다가 도로 자리에 누웠다. 끙, 작게 신음도 냈다. 그는 한 달 동안 모텔 생활을 하면서 우유 판촉 행사만 하다가 돌아왔다. “어머니, 우유 하나 드세요. 어머니, 이젠 어머니 뼈도 생각하셔야죠.” 진만은 낯선 도시에서 한 달 내내 그 말만 입에 달고 살았다. 처음엔 ‘어머니’라고 부른다는 것이 ‘어머나’로 잘못 발음해서 함께 판촉 활동을 하던 김 과장에..
오후의 편의점은 초등학생들의 차지다. 다른 편의점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정용이 일하는 편의점은 늘 그랬다. 가까운 곳에 초등학교가 두 곳이나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편의점은 가깝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편의점 내 테이블에 앉아 삼각김밥을 불닭볶음면이나 국물떡볶이에 찍어 먹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정용은 속으로 그런 노래를 부르곤 했다. 아이들은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학원 숙제를 하기도 했고, 연예인들의 뒷담화에 열을 올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봤다. 중2병이 일찍 찾아온 6학년 아이들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블루레몬에이드를 두 시간에 걸쳐 천천히 마시기도 했고, 연애를 하는 아이들은 하리보 한 봉을 사이에 둔 채 ‘여보’ ‘자기’ 해 가며 말랑말랑한 서로의 ..
“방해만 하지 마.”그는 넥타이를 고쳐 매며 진만에게 말했다. 40대 초반이나 되었을까? 작은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 짧은 헤어스타일에 갈색 구두를 신은 남자였다. 그는 약속시간보다 15분 늦게 아파트 정문 입구에 도착했지만, 거기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진만을 한번 슬쩍 훑어보곤 인사 대신 방해 운운, 말부터 꺼낸 것이었다. 진만은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말은커녕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어쨌든 그는 직장 선배였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말할 틈도 주지 않았다. 그는 마치 여러 번 같은 집을 찾아왔던 집달리처럼 가장 가까운 아파트 동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아이들이 모두 학교나 유치원에 간 오전 9시15분, 혁신도시 내 신규 입주 아파트 단지는 한가롭고 평화로워..
진만은 대기실 의자에 앉아 통유리 너머 사무실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바로 옆 정수기에 붙어 있는 ‘사용 시 주의사항’ 항목들을 한 자 한 자 읽어나갔지만, 저도 모르게 자꾸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사무실 안에는 모두 세 명이 앉아 있었다. 두 명은 평상복 차림이었고, 한 명은 정장 재킷에 넥타이 차림이었다. 넥타이를 한 사람은 바로 좀 전까지 진만의 옆에 앉아 있던 남자였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사무실 안에서는 종종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진만은 양 손바닥을 바지에 쓱쓱 문질러보았다. 이제 곧 진만의 차례였다. 안 떨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귓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허벅지 뒤편도 자꾸 당기는 기분이 들었다. 진만은 눈을 감은 채 숨 호흡을 길게 한 번 내쉬었다. 그러곤 손가락으로 바지 위..
정용이 일하는 편의점 바로 옆 상가는 한 은행의 자동화기기 창구였고, 다시 그 옆은 통닭 한 마리에 칠천원씩 파는 옛날통닭 전문점이었다. 옛날통닭 두 마리를 사면 만이천원. 오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부부가 운영했는데, 따로 배달은 하지 않고 홀에 테이블 네 개를 두고 생맥주와 소주를 함께 팔았다. 정용은 퇴근할 때마다 옛날통닭 전문점 안을 힐끔 바라보곤 했다. 손님이 한두 명 앉아 있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부부가 한 테이블씩 꿰차고 앉아 TV를 보거나 스마트폰을 하고 있었다. 그들 부부는 마치 지금 막 싸운 사람들처럼 말이 없었고, 지친 표정들이었다.얼마 전이던가, 실제로 정용은 편의점 밖으로 재활용품을 내놓기 위해 나왔다가 옛날통닭 전문점 부부가 싸우는 모습을 목격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
진만은 집안 분위기가 어딘가 모르게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다. 가구도, 벽지도 그대로였는데, 그런데도 그 느낌을 지울 길 없었다. 뭐지? 진만은 마치 마감 후 물품이 맞지 않은 알바생처럼 다시 한번 찬찬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변할 것도, 달라질 것도 없는, 지은 지 삼십 년 된 방 두 칸짜리 연립주택이었다. 군데군데 금이 간 마룻바닥과 누리끼리하게 변한 싱크대 위 타일들, 그리고 흐릿한 형광등 불빛까지, 모두 예전 그대로였다. 이상하네? 진만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거기, 침대 바로 앞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예전에 방영되었던 사극이었다. 진만은 가만히 할아버지를 따라 TV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야 무엇이 달라졌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삼계탕집 주방 알바를 그만..
새벽녘 전화를 걸어온 민화는 마지막 코끼리를 보러 가자고 말했다. “마지막 코끼리?” 나는 이불을 끌어 올리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오늘 오후 2시49분에 지구상 마지막 코끼리가 죽을 거래. 이제 세상에 코끼리는 없어.”언론은 늘 ‘마지막’, ‘멸종’이라는 단어를 즐겨 쓰며 인간의 ‘마지막’ 남은 감수성을 자극해왔다. 사실은 복제 기술 덕분에 생명 종 다양성은 얼마든지 실현 가능해졌다. 인간도 과학기술상으로는 복제 가능한 세상이다. 단지 불법일 뿐이다. 코끼리 복제가 어려울 리 없었다. 그래도 나는 호기심에 민화를 따라가기로 했다. 오후 2시경 안락사 장소인 ‘종 다양성 연구소’에 도착했다. 마지막 코끼리의 모습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이미 10만 명이나 있었다. 하늘에는 대형 코끼리 애드벌룬이 띄..
“너희 절대 웃으면 안된다, 알았지?”조의금을 내고 방명록에 이름을 적던 진만과 정용에게 접수대 뒤에 앉아 있던 영걸이 마치 은밀한 지령이라도 전달하듯 말했다. 영걸은 진만과 정용의 대학 동기였다. 대학교에 다닐 땐 함께 PC방도 다니고 축구도 하면서 꽤 친하게 지냈는데, 졸업 이후 연락이 뜸했다. 전해 들은 말로는 큰아버지가 운영하는 경기도 어디 의류상가에서 일한다더니, 그래서 그런지 입고 있는 와이셔츠도, 양복도 말끔해 보였다. 비록 장례식장 접수대 뒤에 앉아 있었지만 어쩐지 대기업에 다니는 회사원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용과 진만은 늘 입고 다니는 하얀 면티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뭔 소리야?” 정용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그들 뒤로 바로 다른 조문객 두 명이 들어오는 바람에 제대로 된 대답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