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 농단’을 입증하는 태블릿 PC가 나왔다는 그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이태리 식당에 있었다. 막 ‘먹물 파스타’를 주문하고 난 참이었다. 스마트폰에 와이파이를 접속해 익숙한 포털 사이트 로고를 터치하는 순간, 쾅 하고 머리를 북채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생업에 위기가 닥쳤음을 직감한 것이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으나 밥맛은 천리만리 달아난 지 오래였다. 코로 먹는지 입으로 먹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눈으로 먹는 것, 아니 흡입하듯 탐식하는 건 확실히 있었다. 뉴스였다. 스마트폰의 액정 위로 흘러넘칠 듯 폭발하는 뉴스. 태블릿 PC에 든 내용이 연설문을 비롯해 외교와 안보 관련 정책 등 권력 핵심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임을 알게 되자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주변에 앉아 있는 외..
역사는 2016년 가을을 ‘사기꾼들의 전성시대’로 기록할 것이다. 미국에서 사기꾼들이 최고의 호경기를 누렸던 때는 18대 대통령 율리시스 그랜트의 재임 기간이었다. 금시장을 공황 상태에 빠뜨렸던 ‘검은 금요일’과 대통령의 개인 비서 등이 정부 돈 수백만달러를 빼내 썼던 ‘위스키 링’ 추문은 모두 그랜트의 비호 또는 묵인 아래 발생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딴 ‘그랜트주의’는 무능, 부패, 담합, 족벌주의, 정실인사가 버무려진 ‘잡탕 스캔들’을 상징한다. ‘그랜트주의’는 내년부터는 ‘트럼프주의’에 자리를 내줘야 할지도 모른다. 미국 역사상 가장 자질이 떨어지는 대통령을 주연으로 캐스팅한 막장 드라마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미국과 달리 한국의 막장 드라마는 종영을 앞두고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대통령과 호..
오늘 201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다. 대학 입시의 공정성과 엄밀성은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다. 입시에서는 단 한 명이라도 불이익을 받거나, 특혜가 주어져서는 안된다. 수능 문제는 전 영역에서 한 점 흠결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올해 수험생들은 그 어느 때보다 사회적 혼란이 크고 입시 공정성이 훼손된 상황에서 시험을 치르게 됐다. ‘비선 실세’ 최순실씨 딸의 이화여대 입시부정에 수험생들은 분노를 억누르기 힘들었을 것이다. 대학은 실세의 딸을 위해 입시요강을 바꾸고, 면접 점수를 조작했다. 특혜는 입학 이후에도 계속됐다. 교수들은 일개 학생에게 상상할 수 없는 편의를 제공했다. 중학생 수준도 안되는 비문 투성이 리포트에 높은 점수를 주고 수강신청을 대신 해줬다. 그런데도 당사자는 부끄러..
박근혜 대통령이 그제 변호인 선임을 계기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기존 태도를 갑자기 바꿨다. 그동안 민심에 정면으로 맞서기를 피하며 눈치 보던 박 대통령이 구차한 이유로 검찰 수사를 미루면서 반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때맞춰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와 친박 세력도 대통령 옹호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위기 때마다 동원했던 박 대통령의 수법 그대로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침몰과 백남기 농민의 사망 등 자신에게 불리한 사태가 발생하면 버티면서 책임을 회피해왔다. 야당과 전 정권에 책임을 돌리기 일쑤였고, 여의치 않으면 색깔론을 제기해 지지자들의 결집을 꾀했다. 문제 해결을 미룬 채 소모적 갈등을 불러일으킨 뒤 시민들이 피로감을 느낀다는 핑계로 덮고 넘어가려 했다. 여당과 지지자..
국정 사유화로 퇴진 압박에 직면한 박근혜 대통령, 당선과정은 정당했을까? 나는 2013년 9월 복지단체 동료들과 함께 대통령을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기초연금 공약을 유권자에게 사실과 다르게 알리고 당선되었다는 ‘허위사실 공표’가 고발의 이유였다. ‘기초연금 20만원’은 박근혜 후보의 대표적 복지공약이었다. 야당도 내걸었기에 순조롭게 추진되리라던 기초연금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부터 파동을 겪었다. 인수위원회가 국민연금 가입기간과 연동해 기초연금액을 깎는 방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논란이 커지자 당선자가 인수위원회 국정과제 토론회에 직접 나와 자신의 공약을 상세히 설명했다. ‘국민연금 미가입자에겐 기초연금을 20만원 전액 지급하고, 국민연금 가입자는 국민연금 급여 안에 있는 ..
청와대는 부인하고 있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은 가부 차원을 넘어 이제 시간의 문제가 됐다. 시민 마음에 박근혜 정부는 이미 실각한 대통령과 아무 일도 못 하는 식물정부로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상의 국정 중단 상태가 앞으로 1년 넘게 지속될 수는 없는 일이다. 대통령이 스스로 일을 매듭짓지 못하면 야 3당과 시민사회가 나서야 한다. 대통령 퇴진과 중단된 국정을 재개하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마침 야 3당 모두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간 ‘대통령 2선 후퇴’라는 모호한 입장에 서 있던 제1야당 더불어민주당도 그제 대통령 퇴진을 당론으로 정했다. 민주당 추미애 대표도 “야 3당과 시민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으기 위한 비상시국기구 구성을 위해 구체적 노력에 들어가겠다”며 “조속한 ..
박근혜 대통령의 변호인이 어제 밝힌 검찰 수사에 임하는 입장은 귀를 의심할 만큼 믿기지 않을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조사 시기는 ‘대통령 관련 의혹 사안이 모두 정리된 뒤에’, 조사 방법은 ‘서면조사’를 제시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구속된 최순실·안종범·정호성·차은택씨는 물론 이제 막 시작된 안봉근·이재만 전 비서관들에 대한 수사까지 모두 완료된 시점에야 조사를 받겠다는 것이다. 변호인으로서 사건을 검토하고 변론 준비를 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누가 봐도 시간 끌기요, 검찰 수사를 가로막겠다는 술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수사 시기와 방법을 입맛대로 고르겠다는 것은 박 대통령이 저지른 범죄혐의의 중대성을 고려해도, 여전히 법 위에 군림하겠다는 오만방자한 태도로 비춰봐서도 용납될 수 ..
나흘 만에 돌아온 집과 농장은 참 고요했다. 가을색은 더 깊어져 있어서 곱게 늙어가는 귀인처럼 애잔해 보였다. 서울에서 가장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은 12일 밤 11시쯤 광화문광장 주무대에서 진행된 ‘시민자유발언’ 시간이었다. 전혀 가공되지 않은 생목소리들에 나는 압도당했다.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던 것으로 보이는 여성 연극인이 무대에 섰다. 주어진 3분 동안에 쏟아낼 말들은 너무 많았고 쌓인 울분은 산을 이루었다. 작품과 공연이 거부되었던 그 예술인의 피를 토하는 울부짖음은 얼굴 전체를 큰 눈물덩어리로 보이게 했다. 예술인들의 자유혼을 짓누르고 고통을 기획한 당사자들을 지목했다. 조윤선 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직접 거명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노동자가 올랐다. 민주노총 조합원으로 보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