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은 소위 ‘87년 체제’가 성립된 지 30년 되는 해이다. 30년은 꽤 긴 시간이다. 한국처럼 급변하는 공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많은 것이 크게 변했다. 단언컨대, 제왕적 대통령제, 독과점적 양당제, 지역주의와 결합된 소선거구 1위 대표제 등을 핵심으로 하는 ‘87년 승자독식 체제’로는 복잡해진 우리 사회의 중층적이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제대로 조정하고 관리해낼 수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 소상공인, 청년 등 규모가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적으로는 늘 약자일 수밖에 없는 이른바 ‘약대(弱大)집단’의 선호와 이익이 정치과정에 제대로 반영될 수 있도록 선거제도, 정당체계, 권력구조 등을 총체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 사회의 압도적 다수인 약자와 소수자의 정치적 대표성..
첫째, 이것은 ‘딜(협약)에 의한 재민주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딜에 의한 민주화’는 민주화이행론에서 민주화의 방식들중 하나다. 1987년 6월항쟁은 대중봉기가 주도했고, 재야를 매개로 느슨하게 이어진 보수 자유주의 세력이 노태우 집권당 대선후보의 ‘6.29선언’에 합의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아니 찍는 듯했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것으로 제도정치권 그들 사이의 ‘민주화 딜’은 이뤄졌다. 다음달 터져나온 이른바 ‘노동자 대투쟁’이 없었다면 그 딜은 온전했거나, 아니 좀 밋밋했을 것이다. 그럼 지금 이것은 무엇일까? 이것도 딜로 끝날 것이다. 헌정을 중단하지 않으면서 이뤄지는 재민주화. 이명박·박근혜 우파정권이 농단하고 훼손시킨 민주주의의 회복, 헌정질서로의 복귀. 이 목표에 대해서 보수파들, 심지어 일부..
불과 보름 전만 해도 박근혜 대통령은 수사 대상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던 검찰이 금명간 박 대통령을 조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순실씨 비위에 관한 언론의 잇단 보도와 박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100만 촛불 민심이 검찰 수사를 견인한 것이다. 하지만 검찰은 여전히 억지춘향 격으로 수사에 임하고 있다. 박 대통령을 참고인 신분으로 규정한 게 단적인 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실체 규명보다는 박 대통령에게 가벼운 혐의를 적용해 하루빨리 사건을 털어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검찰 주변 얘기를 종합하면 검찰은 청와대와 최씨가 재벌·대기업에서 미르·K스포츠 재단에 총 774억원을 거둬들인 행위에 대부분 뇌물죄가 아닌 직권남용죄 적용을 검토하고 있다. 직권남용죄는 재단 설립 과정에 재벌..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어제 박근혜 대통령과의 양자회담을 불쑥 제안했다가 당 의원들의 반발로 한나절 만에 철회했다. 긴급 의총에서 다수 의원들은 충분한 논의 없이 양자회담을 졸속 결정한 그에 대해 강력 성토하며 회담 취소를 요구했다고 한다. 추 대표의 이날 깜짝 제안은 시기도 형식도 뜬금없었다. 두 사람이 만나 정국 수습이란 큰 틀의 의제를 놓고 담판을 짓겠다고 하지만, 견해차가 커 애당초 성과를 기대하기는 난망했다. 대통령이 퇴진하겠다는 분명한 의사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서로 할 얘기만 하고, 검찰 조사를 앞둔 박 대통령의 위상만 높여주는 회담은 시민들의 부아만 돋울 뿐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회담 제안도 다른 야당들과 사전 협의 없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민주당 지도부 가운데서도 일부만 알..
“초코파이 받아가세요!” 혼잡한 광화문역을 겨우 빠져나오자마자 들린 첫 음성이었다. 엄마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에서 준비했다며 사람들에게 초코파이를 하나씩 나눠준다. 나도 받아들었다. 초코파이는 달콤하고, 사람들의 표정에는 활기가 넘친다. 차가 사라진 거리는 이미 남녀노소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가득 찼다. ‘많이 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실제 인파를 확인한 사람들 사이에 묘한 동질감이 흐른다. 줄줄이 서 있던 통신사들의 중계기가 무색하게 어느 순간부터 인터넷은 터지지 않고 전화도 끊기기 일쑤였지만 불편하지 않다. 말 그대로 인파를 헤치며, 아니 떠밀리듯 이동했다. 집에 가는 지하철 막차 안보다 사람이 더 많다. 광화문 앞 세종대로에서 사람에 밀려다니는 경험은 또 처음이다. 짜증이 날 법..
교육담당 기자를 하면서 교사들에게 자주 들었던 말 중 하나가 우리 교육의 분위기가 확 바뀐 게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외환위기 사태를 겪으면서라는 것이었다. 초등, 미취학 아동까지 사교육이 급증하며 놀이터에 아이들이 안 보이기 시작한 것도, 선망의 직장을 향한 무한경쟁 속에서 아이들이 부쩍 독해지고 폭력적이 되어간 것도, 교사들 간의 연대가 무너진 바탕에도 외환위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고 했다. 가르치진 않았지만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배웠다. 부모가 직장에서 잘리고, 삼촌의 사업이 망하고, 어른들의 이혼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내 삶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것을. 친구를 밟고 올라서 1등을 하고 각종 자격증으로 무장해야 정년까지 살아남을 수 있고,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
촛불이 헌법이다. 유사 이래 최대의 집회로 기억될 민중총궐기에서 우리는 100만개의 촛불과 100만개의 헌법전을 목도한다. 그것은 저항권이라는 고루한 법용어에 그치지 않는다. 침탈당한 주권을 되찾기 위한 항의의 수준을 넘어 그 주권이 담아내어야 할 내일의 세상을 도모하는 우리 모두의 외침이기 때문이다. 한 외신이 ‘공동통치’(mitregieren)라 이름하였다는 대통령과 그 일행의 막장 스캔들은 문제의 시작일 뿐이다. 암종의 뿌리는 청와대와 고위공무원과 정치권과 검찰과 언론과 재벌, 심지어 학계에까지 펼쳐진 이 땅의 모든 권력에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향해 공모하고 담합하여 비선조직으로 국정을 농단하며 세상을 우롱하였다. 샤머니즘이나 말타기와 같은 ‘창조’적 문화는 그로 인한 구정..
박근혜 대통령의 지난 3년8개월 재임 동안 비선 세력의 국정농단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장막에 덮인 의혹이 있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 때 박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이다. 박 대통령은 당일 오전 10시30분 전화로 구조 지시를 했고, 오후 5시15분에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사이 박 대통령이 무엇을 했는지를 놓고 굿, 성형수술 등 억측이 제기돼왔다. 여당 새누리당은 ‘대통령 사생활 보호’를 주장하며 정보 공개를 막았고, 청와대는 “청와대에서 업무를 봤다”고만 해왔다. 최근 의혹이 다시 불거지자 청와대는 당일 오전 10시36분부터 오후 5시11분까지 “15차례 보고를 받았다”고 밝혔다. 성형수술 의혹에는 담당 의사의 골프장행을 알리바이처럼 대고 있다. 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