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13일 청와대 홈페이지 게시판에 교사 43명의 글이 올라왔다. 세월호 참사에 책임을 지고 박근혜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틀 뒤인 5월15일 스승의날에는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과 후속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교사들의 성명이 낭독됐다. 그해 6월까지 박 대통령 퇴진을 주장한 교사는 123명, 일간지 광고 등에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한 교사는 161명이었다. 박근혜 정권이 이들을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세월호 관련 여론이 잠잠해지자 교육부와 보수 단체를 시켜 교사들을 수사기관에 고발했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고 집단행동을 했다는 이유였다. 200여명이 검찰 조사를 받았고, 100명 가까운 교사들이 지금도 재판과 교육청 징계 절차를 밟고 있다. 지난달 30일 최저임금 1만원 등을 요..
세월호가 우여곡절 끝에 3년 만에 인양됐다. 미수습자들을 찾아야 하는 가족들의 고통은 또다시 시작됐는데, 공직사회에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해 11월까지 세월호 인양추진단장을 맡았던 전직 해양수산부 고위공무원이 산하 기관에 ‘낙하산’으로 내려간 것이다. 해수부는 지난 17일 산하 ‘한국해양과학기술진흥원’ 새 원장에 연영진 전 해수부 해양정책실장(59)을 임명했다. 정부는 세월호 참사 뒤 ‘관피아(관료+마피아)’를 없애겠다고 법까지 제정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정작 세월호 수습을 맡은 공무원을 보란 듯 관피아로 앉힌 것이다. 해수부는 “진흥원은 안전문제나 이권과 관련된 산하 기관이 아니고, 관피아 방지법의 적용 대상도 아니라 문제가 없다”고 했다. 이는 본질을 비켜간 설명이다. ..
세월호 참사 3주기, 가만있으려니 견딜 수 없는 불안증이 엄습해 안산 합동분향소를 찾았다. 4월의 찬란한 햇살 아래 유채꽃처럼 눈부시게 피어나던 아이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믿고 배와 함께 침몰해야 했던 이들의 기억을 떠올리며 사람들은 눈물을 닦기에 바쁘다. 노랫말이 가슴에 와 꽂힌다. “이제 4월은 내게 옛날의 4월이 아니다. 이제 바다는 내게 지난날의 바다가 아니다.” ‘국가의 실패’, 인천항을 출발할 때부터 침몰까지의 과정, 정부의 방해로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중단된 세월호특조위, 그리고 탄핵을 신호로 처참하게 인양되기까지 세월호에 숨어 있는 본질은 ‘국가의 실패’이며, 실패의 본질을 감추기 위한 불의한 ‘국가폭력’이기도 하다. 실패한 국가와 부당한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뭍을 떠난 지 1081일 만에 다시 뭍으로 돌아오는 세월호를 맞는 가족들의 모습을 4·16연대 미디어위원회가 촬영한 동영상으로 지켜보았다. 보안구역인 목포신항만의 철조망에 막힌 한 어머니는 “우리 아이들이 거기 있었다고요. 거기에서, 마지막 시간을 살려고 보냈다고요. 세월호 안에서…”라며 세월호를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들여보내 달라고 절규했다. 결국 항만으로 들어선 가족들은 여기저기 구멍이 뚫리고 녹슨 세월호가 눈앞에 다가오자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꿇어앉아 머리를 짓찧으며 통곡했다. 화면을 지켜보는 나는 2014년 4월16일 그날처럼, 또다시 그 애끊는 오열의 무력한 목격자가 되었다. “남을 도울 힘이 없으면서 남의 고정(苦情)을 듣는다는 것은 매우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것은 단지 마음 아픔에 그치지..
그해 봄, 바다는 눈물이었다. 검은 섬을 휘감는 시퍼런 바닷물을 마주한 어머니의 멈추지 않는 눈물은 바다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다. 그대로 바다가 넘쳐 내 자식이 내 혈육이 멀쩡하게 뭍으로 나오기만 한다면 육신이 사그라진다 해도 울고 또 울었을 것이다. 시뻘겋게 녹슨 바닥을 드러낸 배를 보면서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또 울었다고 했다. 우는 것밖에 할 게 없어서 다리 뻗고 앉아 가슴 치며 울었던 그해 봄처럼. 자식을 잃은 어머니에게 봄은 또다시 되풀이되는 눈물의 봄이다. 건져 올린 배 앞에서 어머니는 낯선 항구로 부리나케 달려간 그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모두 구조했다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갔는데, 체육관은 텅 비어있고 행여 병원으로 갔나 싶어 물어보니 아직 아무도 병원으로 옮기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프랑스 화가 폴 고갱은 신문기자였던 아버지의 정치적 망명으로 페루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고갱의 젊은 시절 꿈은 배를 타고 세계일주 항해에 나서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견습 도선사(導船士)로 일하며 상선을 타고 라틴 아메리카와 북극의 바다를 떠돌았다. 모친의 부고를 듣고 파리로 돌아와 35세 때 늦깎이 전업화가가 된 고갱은 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 섬,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 등으로 옮겨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고갱이 화가가 된 이후 방랑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은 견습 도선사로 일했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다. 도선사는 선박이 항구에 안전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안내하는 전문직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겐 낯선 직종이다. 수년 전 한 해군 장교가 114 안내원에게 도선사협회를 연결해달라고 했더니 서울 우이동에 있는 사..
일요일인 지난 26일 오후. 미세먼지가 하늘을 가린 안산 세월호 분향소 광장은 춥고 쓸쓸했다. 추모의 마음으로 걸치고 갔던 노란색 머플러를 목 주위로 돌려 감아도 파고드는 냉기를 막을 수가 없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1072일 만에야 물 위로 올라온 세월호를 지켜보는 단원고 희생자 엄마들은 자신들의 마음이 꼭 그렇다고 했다. “3주기가 다가오니 너무 힘들어요. 선체 인양을 바라보는 것도 그렇고요.” 매달 단원고 희생자 부모들과 함께하는 모임에 따라나섰다 만난 영만이 엄마는 두어 마디 끝에 결국 울먹였다. “이제야 세월호가 올라오네요. 곧 미수습자 가족들이 그렇게 원하던 유가족이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우리 유가족들의 삶이 그리 행복하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유가족이 되고 난..
세월호를 실은 반잠수식 선박 갑판 위에서 뼛조각 7점과 신발 등 유류품이 발견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뼛조각은 미수습자의 유해가 아닌 동물의 것으로 확인됐다. 실종자의 유류품이 발견된 것은 미수습자 수색작업이 끝난 지 2년4개월여 만이다. 정부가 세월호 미수습자 수색을 종료한 뒤 절망 속에 살던 미수습자 9명의 가족은 실낱같은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유류품이 선체 밖에서 발견돼 유실 가능성에 대한 대책이 부실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배가 기울고 있어요.” 2014년 4월16일 단원고의 한 학생은 전남소방본부 119 상황실에 첫 신고를 했다. 세월호 참사의 시작이다. 배가 기울고 침몰하는데도 ‘기다리라’는 말을 따르다 단원고 학생을 포함해 304명이 목숨을 잃었다. 세월호는 서서히 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