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책 한권을 받았다. 평택 쌍용자동차(쌍차) 공장 굴뚝에서 오늘로 84일째 고공농성 중인 쌍차 해고노동자 이창근의 해고일기다. 책 첫머리엔 85호 크레인에서 309일 동안 고공농성을 벌인 김진숙 지도위원의 추천사가 실려 있었다. 추천사를 읽다가 눈과 마음에 오랫동안 머문 글 내용이 있었다. “어쩌면 저들이 더 절박할 텐데 그러나 난 그걸 애써 외면했다. 한진에 와야 할 관심이 혹여 쌍차로 가면 어쩌나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그들보단 우리가 더 절박하다고, 우리를 더 먼저 봐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쌍차를 봐주세요 했던 가증스러움. 인간은 다급하면 본성이 드러나는 법이란 말, 그래서 찔린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가증스러움과 본성이라는 두 단어의 절묘한 조화였다. 그게 어떤 의..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다만 불편할 뿐이다.’ 이 말을 믿었다. 불편만 감수한다면, 돈이 없어도 누구나 자신만의 삶을 꾸려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돈이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다르다. 돈은 세상을 조종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돈 많은 대기업들의 영향력을 보면서다. 특히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이 많이 든다. 며칠 전 판결이 하나 나왔다. ‘이마트는 대형마트가 아니다’라는 서울고법의 판결이다. 재판부가 이렇게 판단한 이유 중 하나는 이렇다. “시장경영진흥원이나 소상공인진흥원의 조사 결과는 영업 제한에 우호적인 단체가 단기간 조사한 결과인 반면, 연세대 정진욱·최윤정 교수가 집필한 ‘대형 소매점 영업 제한의 경제적 효과 분석’은 광범위한 조사를 거친 객관적, 과학적 연구..
참으로 추운 겨울이다. 수은주는 영하 십수도를 오르내리고, 대지는 꽁꽁 얼어붙었으며, 칼날처럼 예리한 삭풍은 행인들의 속살까지 파고들고 있다. 기쁘고 희망찬 소식보다는 갑갑하고 참담한 소식만 잇따르고 있는 작금의 현실은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게 더한층 추위를 느끼게 한다. 그런데 이 혹한 속에서도 생존의 막다른 벼랑 끝에서 눈물겨운 싸움을 이어나가는 우리의 이웃이 있다. 정리해고 철회 등을 요구하며 공장 굴뚝 등 까마득히 높은 곳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이창근 정책기획실장과 김정욱 사무국장은 13일 새벽 경기 평택공장 내 70m 높이의 굴뚝 위에 올랐다. 병마와 싸우고 있던 또 한 명의 해고노동자는 이날 세상을 떠났다. 26번째 ‘해..
서울지방변호사 회 인권위 소속 변호사들이 어제 대법원의 쌍용자동차 판결을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이들은 “해고 노동자를 벼랑 끝으로 내몬 판결에 유감”이라며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와 존재를 외면한 판결”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번 사건은 극도의 사회적 갈등과 생명의 존엄성이 걸린 사안”이라며 “해고 노동자들이 왜 자살을 선택했는지 한번이라도 고민해 봤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 변호사들은 “대법원은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는 마지막 보루”라며 이번 판결에 아쉬움을 표시했다. 변호사들이 대법원 판결을 노골적으로 비난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서울변회는 2011년 쌍용차 사태에 대한 특별조사를 통해 국가공권력의 인권 침해와 노사합의 불이행을 그 원인으로 꼽은 바 있다. 쌍용차 문제에 관한 한 전문가 집단이다. ..
엄마가 점을 봤다. 연초가 되면 으레 봤었는데 2009년 그 사건이 있고 나선 좀체 보지 않던 점이다. 아들이 구속되면 어찌하느냐며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 묻고 또 물었다. 어느 점집에선 구속되지 않을 테니 걱정 말라고 했고 또 어떤 ‘점바치’는 구속된다고 했다. 결국 아들은 구속됐다. 그 뒤론 발길 끊었던 점집을 이번에 다시 찾았다.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 대법원 선고를 앞둔 며칠 전 일이다. 결과를 말해주지 않아 몰랐는데 희망이 별로 없었나 보다. 수화기를 타고 넘어 오는 목소리가 마른 나뭇가지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지난 11월13일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무효 소송에서 지고 말았다. 대법원은 서울고법이 쌍용차 정리해고 무효를 판결했던 사건을 뒤집어 파기하고 서울고법으로 돌려 보냈다. 6년의 ..
지난 13일 대법원은 2009년 쌍용자동차의 구조조정이 적법하다는 판단을 내놨다. 아스팔트에서, 농성장에서, 법정에서 5년 넘게 싸워온 153명의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은 바람 찬 거리에서 다시 기약없는 싸움을 벌여야 할 처지에 놓였다. 지난 5년간 25명의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이 세상을 떠났다. 삶의 기반이 통째로 무너져내린 극한의 상황에서도 쌍용차 해고자들이 2000일 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언제든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나와 가족과 동료의 삶의 존엄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들의 마음을 밝히던 희망의 불빛을 야멸차게 꺼버렸다. 승리의 전망은 흐릿해졌다.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모르겠다. 별의별 것과 싸워왔는데 잘 모르겠다, 이제는. 남은 해고..
11월13일 수능의 강추위가 몰아친 초겨울에 대법원에서는 또 다른 매서운 칼바람이 있었다. 쌍용자동차의 정리해고에 대해 2심 판결을 뒤집고 ‘문제가 없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기나긴 세월을 인내하며 복직을 희망하던 노동자들은 눈물이 터졌고 재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과연 문제가 없는 것일까? 기업인은 웃고 노동자는 울어도 되는 세상을 정당화하는 가치는 현 정권의 ‘창조경제’론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우리 사회가 참으로 건강하고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 창조경제가 결코 창조하지 못하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성찰해 보고 행동해야 할 때이다. 창조경제는 외형상 세계 자유시장에서 경쟁력을 근거로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하고자 하지만, 신자유주의 세계 체제에서 비교 우위를 선점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
“기자님, 진짜 이거는 바꿔야 됩니다. 1심 2심 3심까지 가면 몇 년 걸리잖아요. 사장이야 오래 끌수록 좋겠지만 회사에서 잘린 노동자는 그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견딥니까. 이것 좀 어떻게 해야 한다니까요 정말.” 지방의 한 노동조합 사람들을 취재하고 기차역으로 향하는 길에 중년의 노동자가 수차례 반복했던 말이다. 해고의 부당함을 확신하고 있는 그에게 세상은 납득되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부도덕한 사장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비용을 줄이고 싶거나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직원들이 있다면, 해고하면 된다. 법은 부당한 해고를 못하도록 하지만 법이 최종적으로 부당성 여부를 판단하기까지는 해고 상태가 유지된다. 부당 해고가 아니라는 최종 판결이 나오면 좋고, 부당하다고 하면 그때 가서 복직시키면 된다. 욕먹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