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솎는 일은 나무에게서 나비를 빼앗는 일 이유 없이 헤어진다 한 꽃이 다른 꽃들과 비바람과 벌레와 새들에게 기꺼이 몸을 내어줌으로 농부의 곁을 지켜주는 과일을 먹는다 파치의 시간으로 잠들고 깨어나는 나는 가슴에 몇백 개의 꿈을 더 가졌다 나는 갖가지 영혼의 양초를 파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 상한 과일들이 빌려준 시간 속으로 성한 과일들이 들어온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인 그림자 속으로 달콤한 햇빛 한 줌 기울어온다 조현정(1971~) 약간 벌레 먹은 것이나 비바람에 떨어져 멍이 든 복숭아를 싸게 사 먹은 적 있다. 파치 중에서 그나마 성한 걸 골라 팔고, 상태가 안 좋은 것들은 버려졌을 것이다. 배달된 복숭아를 칼로 도려내며 먹다 보니, 정품과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농부는 온전한 과일을 생산하기..
“도대체 누구를 위한 파업인가. 민주노총의 오만한 대국민 협박에 진저리가 난다.” 지난 22일 국민의힘은 최근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이 같은 논평을 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귀족노조’ 프레임을 다시 들고 나왔고, “생때같은 줄파업” “불법투쟁” “대국민 갑질” 등의 발언이 여당 쪽에서 일제히 쏟아졌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화물연대 파업과 관련해 ‘불법’과 ‘폭력’으로 규정했다. 학교 급식조리사들이 노동을 중단하고, 화물차들이 운송을 멈추고, 건강보험 고객센터 노동자들이 전화기를 내려놓고, 지역난방 열배관을 점검하는 일이 중단됐다. 이러한 ‘물리적 타격’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폭력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거꾸로 누가 노동자들의 파업을 폭력으로 규정하는지 그 입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익’..
검찰에 출입할 때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급 이상 간부들이 기자들 군기를 잡는 손쉬운 방법이 있었다. 미운털이 박힌 기자를 제 방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는 건 약한 편에 속했다. 전화도 받지 않거나, 혹여 받더라도 모르쇠로 일관하면 기자는 ‘단독기사’는 고사하고 남이 쓴 기사도 받아쓰지 못하는 딱한 처지에 놓인다. 때로는 특정 기자의 태도를 문제 삼아 차장검사가 출입기자단과 정례적으로 하는 티타임을 중단하기도 했다. 티타임에서 듣는 말의 뉘앙스로 수사의 진행 상황을 가늠해야 하는 기자들에게 티타임 중단은 일종의 단체기합이었다. 검찰과 언론의 극단적인 정보 비대칭에서 가능한 군기잡기였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MBC에 취한 기이한 대응은 기존의 정치문법으로는 독해가 불가능하다. 특정 언론사 기자의 대통령 전용기..
성남시의료원이 위기다. 2003년 성남시 원도심에 있던 종합병원 두 곳이 갑자기 없어지면서 생긴 의료공백 해소를 위해 두 차례에 걸친 주민 조례 발의 운동을 통해 힘들게 설립된 성남시의료원이다. 공공병원의 모범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받았지만 이러한 기대를 무너뜨리는 일이 계속 발생한다. 개원 준비를 하던 시기, 은수미 시장에 의해 초대원장이 사임한다. 병원 운영 방향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으로 보였다. 6개월 뒤에나 새 원장이 취임한다. 성남시의료원의 시범 진료 개시 두 달 만에, 코로나19 감염병 유행으로 인하여 감염병전담병원으로 지정되었고 3월로 예정된 개원식은 연기되었다. 많은 병상이 코로나19 격리병동이 되고 일반진료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고 주민도 이용을 꺼리게 되었다. 올해에는 원장의..
이태원 참사, 이태원 블루가 된다 실패한 애도의 유령인 멜랑콜리가 죽어서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그날이 올 때까지 멜랑콜리하자 멜랑콜리? 고대 그리스의 의학용어였다. ‘혼합한’ ‘검은’의 멜랑과 ‘담즙’의 콜리를 합친 ‘검은 담즙’을 뜻하는 말이자 동시에 이 검은 담즙의 과잉과 불균형이 유발하는 질병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히포크라테스는 “오래 지속되는 두려움과 슬픔”으로 무기력해지는 증상을 멜랑콜리로 진단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멜랑콜리를 학문과 예술, 그리고 정치에서 탁월한 사람들이 걸리기 쉬운 병으로 봤다. 병이지만 예민한 천재와 숭고한 영웅들의 성향이기도 했던 것이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멜랑콜리를 구별한다. 그에게 애도와 멜랑콜리는 리비도를 집중했던 대상의 상실이라는 동..
선명하게 기억나는 순간들이 있다. 치과 대기실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TV를 등지고 앉았는데, 맞은 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TV에 집중된 것을 깨달았다. 몸을 돌려보니 화면 속에서 커다란 배가 기울어지며 가라앉고 있었다. 세상에 저렇게 큰 배가? 수학여행 가던 학생들이라고? 어떡하지? 하지만 걱정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빨간 바탕에 커다란 흰색 글자, 탑승객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속보 자막이 흘러갔기 때문이다. 아유, 그럼 그렇지. 저 고등학생들, 오늘 저녁에 무용담 자랑 엄청나겠네. 그러고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현실을 알게 된 것은 치료를 마치고 지하철로 이동해 일터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8년 전 일이지만, 그 순간의 느낌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분노도 슬픔도 아닌, 그냥 ‘얼음’이었다...
겨울 김장을 담그는 주재료 중 하나인 무는 삼국시대부터 우리 밥상에 오른 먹거리다. 오랫동안 먹어온 만큼 ‘무우’ ‘무수’ ‘무시’ ‘남삐’ 등 무를 부르는 이름도 다양하다. 하지만 그중 표준어는 ‘무’ 하나뿐이다. 무를 한자어로는 나복(蘿蔔)이라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나복’과 ‘무’의 뜻풀이가 똑같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나박김치의 유래를 이 ‘나복’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다. 이와 달리 조선시대 요리서 에 ‘나박(蘿薄)’으로 표기된 점을 들어, 그냥 “무를 얇게 썰어 담근 김치”를 뜻한다는 주장도 있다. 한자 蘿는 ‘무’를 뜻하고, 薄은 ‘얇다’를 의미한다. “야채 따위를 납작납작 얇고 네모지게 써는 모양”을 뜻하는 부사 ‘나박나박’에서 나박김치라는 말이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다. 이처럼 나박..
국회 정무위는 11월22일 보험사가 보유한 주식 및 채권 평가 기준을 시가로 변경하는 것이 골자인 ‘보험업 일부개정법률안’을 상정하여 본격 논의를 시작했다. 이 법안은 박용진·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20년 각각 대표발의했다. 은행법과 자본시장법에서는 자산운용비율을 산정할 때 타 회사 주식과 채권의 소유 금액을 시가로 평가하고 있으나 보험업법만 유독 취득원가를 고집해 왔다. 이 때문에 삼성생명 특혜법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현재 보험회사의 자산운용비율 산정은 분모인 총자산 및 자기자본은 시가 등을 반영해 작성한 재무제표상 가액을 적용하고, 분자인 주식 및 채권 소유 금액은 취득원가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누가 봐도 이상할 만큼 불합리하고 모순된 구조이다. 이 기준 때문에 보험회사는 대주주 및 계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