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들어 부쩍 자주 언급되는 단어가 있다. 국격이다. “이번 국격 훼손은 국제적 망신을 넘어 국익 훼손까지 이어질 수 있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국제노동기구(ILO)의 화물연대 파업 개입을 두고 한 말이다. “국격이 무너진 일주일.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께 사과하기 바랍니다.” 지난 9월 윤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기 직전에 나온 더불어민주당의 논평이다. 대통령실이 언급한 사례도 있다. 윤 대통령이 월드컵 대표팀 환영 만찬을 여는 등 묵혀뒀던 청와대를 잇달아 사용한 후 대통령실은 국격에 맞는 행사에는 청와대를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국가의 품격을 평가함에 있어 내부의 왈가왈부보다는 외부의 시선이 더 중요하다. 정략적 편들기나 비판보다는 한 발 떨어진 국제사회의 평가가 더 객관적이다. ..
2022년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이제 산골 마을 논과 밭은 모두 겨울방학에 들어갔다. “아이고, 농사일이 오데 끝이 있는가. 고마 죽어삐야 끝나지.” 마을 어르신들이 죽어야 끝난다던 농사일도 잠시 방학이다. 이젠 틈틈이 뒷산에 가서 내년 가을까지 아궁이에 넣을 장작을 하거나 밭두둑에 비닐 대신 쓸 부엽토를 긁어 놓으면 된다. 그리고 장날에 가서 겨울 간식으로 먹을 옥수수와 현미 뻥튀기를 하고, 무를 썰어 겨울 햇볕에 말릴 때이다. 밤이 오면 아내랑 돋보기를 쓰고 벌레 먹거나 쪼그라진 녹두와 팥을 가려내고, 빛깔 좋고 잘생긴 녀석들은 미리 주문한 분들한테 택배로 보내야 한다. 가끔 두더지가 파헤쳐 놓은 마늘밭과 양파밭에 가서 두둑을 꾹꾹 밟아 준다. 그래야만 긴 겨울 내내 뿌리가 얼어 죽지 않는다. 농약..
교원의 학생생활지도 조항을 신설하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이 지난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법 통과를 위해 교원단체는 “교단에 드러눕는 학생에게 교사가 손가락도 대지 못할 정도로 교권이 추락했다”며 백방으로 국회에 로비를 했다. 언론도 ‘날개 잃은 교권’ ‘교실 붕괴’라는 자극적인 단어를 반복하며 비슷한 기사를 열심히 찍어냈다. 그리고 이 법은 전광석화처럼 빠른 속도로 처리되었다. 학생 인권을 보호하면 교권이 침해되는가? 이 물음은 교권과 학생 인권이 서로 대립관계에 있음을 전제로 하며, 이 둘의 균형을 잘 맞춰야 하는 것이 합리적인 해결책인 양 호도한다. 그러나 교권과 학생 인권은 대립관계가 아니다. 교권은 시민이자 미래인 학생을 잘 교육하기 위해 국가가 교원에게 위임한 권한이기에 당연히 학..
20여년 전, 대한민국에 공무원노조를 만들어 보자고 7명의 공무원이 처음 노동상담소로 찾아왔다. 첫만남이어서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저녁밥을 샀다. 헤어지려고 하는데 서울의 한 구청 공무원이 물었다. “앞으로 공무원들은 몇천명이나 해직을 당할까요?” 내가 답했다. “전교조가 2000명이나 해직당하면서 길을 잘 닦았으니까… 훨씬 적게 해직당하겠죠.” 웃으며 나눈 대화였지만 사실 매우 가슴 아픈 일이다. 공무원노조를 설립하고 합법화되기까지 징계받은 공무원은 3000명가량이나 된다. 파면·해임된 공무원은 내 기억으로 약 550명이다. 화물연대의 파업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은 “불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지만 지금까지 노동자들은 불법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거짓 논리 뒤서 부정의 빚어내는 그들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 법왜곡법이 실효성은 떨어져도 적어도 위하·상징적 기제로서 효과는 있으리란 주장에 끌린다 더불어민주당이 지난 11월15일 중점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발표한 주요 법안 중엔 법왜곡죄 도입법이라는 게 있다. 판사나 검사가 부당한 목적으로 법을 왜곡하여 해석 적용할 때 또는 증거나 사실을 조작할 때 형사처벌한다는 내용으로 알려졌다. 법왜곡법의 입법 논의는 2018년 시작되어 이제 네 번째다. 어느 일간신문의 사설은 이 법안의 “발상 자체가 놀랍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다. 독일, 스페인, 노르웨이 등 여러 유럽 국가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법률이 제정되어 있고 실제 처벌례도 제법 있다. 왜곡이란 ‘사실과 다르게 해석하거나 그릇되게 함’을 뜻하는데, 독일..
“기본주택(경기도), 누구나 집(더불어민주당), 상생주택·안심주택(서울시), 원가주택(국토교통부)….” 선거철이면 쏟아져 나오는 각양각색의 ‘○○주택’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려면 이 복잡한 정책들을 울며 겨자 먹기로 구분해내야 한다. 비단 주택 영역만의 특징은 아니다. ‘약자와의 동행’ ‘기본 시리즈(기본소득·주택·금융)’ 등 정치 풍토가 어느샌가 브랜딩부터 시작하는 흐름으로 바뀌었다. 브랜딩은 당연히 중요하다. 직관적이고 기억에 남는 이미지는 국민이 국가 정책을 인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차별화를 통해 새로운 정책을 시도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제 역할을 해낸다면, 정치인의 브랜딩이 그저 표팔이 수단으로만 폄하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최근의 동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정책의..
특정 단어를 언급하지 않고도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어느 날 글쓰기 수업에서 나는 어린이들에게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을 골라달라고 요청했다. 어린이들은 주섬주섬 자기 취향의 이미지를 들고 왔다. 사람일 수도 있었고 동물일 수도 있었고 물건일 수도 있었다. 어떤 사진을 골랐는지 서로 보여주지 않는 게 규칙이었다.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써보자고 제안했다. 다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존 버거의 책 과 비슷한 서술 방식을 연습하려는 의도였다. 글을 완성시킨 열두 살의 서영이가 사진을 가린 채 자기 문장을 읽어주었다. “부글부글 타오르는 불을 상상해봐. 불은 말이지, 아주 뜨겁고 때로는 위험한 거야. 무언가를 강요하는 듯한 색깔이기도 해. 왜 그런 거 있잖아. 엄마가 화나면 튀어나오는..
연말을 앞두고 크고 작은 모임이 잇따르면서 술자리가 많아지는 때다. ‘술배와 밥배는 따로 있다’고 말할 만큼 우리 민족은 예부터 술을 즐겼다. 이제 ‘국민주’로 불릴 만한 ‘소주’도 그중 하나다. 우리 역사에서 소주가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로 알려져 있다. 이후의 많은 문헌에도 소주가 등장하는데, 표기는 하나같이 ‘燒酒’다. 지금의 표준국어대사전도 “곡주 따위를 끓여서 얻는 증류식 술”로 ‘燒酒’를 올려놓았다. 하지만 현재 시중의 상점이나 음식점 등에서 파는 ‘희석식 소주’는 한자를 ‘燒酎’로 적는다. 요즘 술병에는 한자를 병기하지 않지만 이전 술병의 상표에는 ‘燒酎’로 적혀 있었다. 아울러 속칭 ‘문화재’급으로 불리는 증류주들 중에는 술병에 ‘燒酎’를 큼직하게 써 놓거나 소개글에 ‘燒酎’로 적어 놓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