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을 가진 집집마다 의자가 한 개쯤 꼭 있다. 나도 마당에 세어보니 의자가 여기저기 흩어져 여러 개. 내가 아니라도 새가 앉고 가끔 메뚜기나 사마귀, 무당벌레도 앉아. 흔들의자처럼 편한 그네도 하나 있는데 강아지랑 나는 보통 거기 앉거나 누워 해바라기를 즐겨. 발이 네 개인 의자는 울 강아지들처럼 정신없이 돌아다니지는 않아. 컹컹 짖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고요해. 온종일 인내심을 가지고 쭉 기다려. 영국 사람들에게 흐르는 습관이 하나 있는데 ‘기다리며 차를 한 잔 마시는 일’이다. 이때 보통 쓰는 말이 ‘서두르지 말 것(Take Your Time)’. 기다리다 보면 1. 일이 저절로 해결되는 수가 있다. 2. 내 마음이 변하고, 일이 달리 보인다. 3. 모든 일은 결국 때가 있기 마련이다. 독일 작가이..
“지역은 죽어가고 있는데 아무런 처방 없다가 이제 시한부 선고를 하고 감기약을 처방하고 있다.” 내년부터 시행되는 ‘고향사랑 기부제’ 도입을 앞두고 개최된 콘퍼런스에서 인구 소멸 위기를 겪고 있는 강원도 한 군청 팀장의 첫 발언이다. 이어서 “고향세를 통해 우리 지역이 얻고자 하는 것은 재정 확충보다 ‘인구’다. 땅은 넓고 사람은 없다. 출생률, 귀촌 인구를 늘려서 막아보자는 정책은 기대하지도 않는다. 대신 일상으로의 초대, ‘관계인구’를 넓히는 게 핵심이다”라고 했다. 짧지만 임팩트 있는 발표는 진한 여운을 남겼다. 기존 귀농·귀촌 정책의 획기적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늘고 있는 가운데 새롭게 등장한 ‘관계인구’가 주목을 받고 있다. ‘관계인구’란 체류시간에 관계없이 지역의 팬으로, 상품 구매..
2022년이 보름 남짓 남았다. 각종 결산의 시기, 한 해를 결산하는 기사들도 쏟아져 나온다. 역대급이라는 숫자 뒤, 팍팍한 현실이 그려지는 뉴스들이 적지 않다. 하나하나가 수백만 가구, 수천만 시민의 한숨과 눈물, 불안을 담고 있을 ‘폭탄’들인데, 건조한 몇 줄로 무감각하게 소비된다. 올해는 자산 상위 20% 가구(16억5457만원)와 하위 20% 가구(2584만원) 간 자산 격차가 64배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3분기 가구당 월평균 실질소득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대로 줄어든 가운데, 양극화가 뚜렷했다. 하위 20%의 소득 감소율이 상위 20%보다 3배 이상 커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해졌다. 소득 하위 20% 중 적자 가구 비중이 57.7%에 달했고, 이들은 월평균 34만3000원씩 적..
이야기는 세계관의 반영이다. 세계에 대한 해석이 들어간다. 소설가 포스터의 유명한 정리를 응용해보자. “왕이 죽었고, 왕비가 죽었다.” 이것은 스토리다. “왕이 죽었고, 왕비가 슬퍼했고, 그래서 죽었다.” 이것은 플롯이다. 해석이 들어갔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왕이 죽었고, 왕비가 기뻐서 웃다가, 숨이 넘어가서 죽었다.” 같은 스토리의 다른 플롯이다. 해석이 다르고, 세계관도 다르다. 왕의 죽음에 왕비가 웃음을 터뜨리는 세계는 어둡고 비뚤어진 곳이다. 서사시와 고대 비극의 시대에는 주인공은 그의 능력 때문에 성공하고 또한 같은 능력 때문에 몰락하였다. 오이디푸스는 수수께끼를 푸는 솜씨 덕분에 왕이 되었으나, 자기 자신의 수수께끼를 풀어 몰락하였다. 메데이아는 가족도 저버리는 강한 기개로 이아손의 왕..
젠더데스크는 지난 10월 경향신문이 만든 젠더 보도 가이드라인에 따라 성불평등한 표현을 들여다보는 일을 한다. ‘저출산’을 ‘저출생’으로 바꾸고 ‘유모차’를 ‘유아차’로, ‘맘카페’를 ‘육아카페’로 바꾼다. ‘워킹대디’라는 말은 없는데 ‘워킹맘’을 쓰는 것은 차별적이니 다른 대안어를 써보자고 제안한다. 매일 출산, 돌봄, 육아가 여성의 책임인 것처럼 전제한 표현들을 바꿔쓰기 위해 노력하지만 허허로웠다. 지난 3분기 합계출산율은 0.79명, 0.79명의 원인은 태산처럼 복잡하고 풀릴 기미가 없는데 풀 몇 개를 뽑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였을 거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고 후퇴하기 시작하더니 거꾸로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더니,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고 한다. 교육부는 ‘20..
‘세계화는 덫인가, 새로운 기회인가?’ 세계화의 흐름이 거세지던 2000년대 초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저서 를 통해 던진 질문이다. 세계화의 흐름은 피할 수 없고, 세계화의 법칙에 맞추지 못하는 나라는 덫에 걸리게 된다는 게 프리드먼의 주장이었다. 냉전 이후 세계화는 인류의 가장 뜨거운 화두였다. 소련 해체로 냉전체제는 붕괴하고,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세계화가 이를 대체하는 글로벌 질서로 등장했다. 좋든 싫든 국가와 기업은 세계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세계화는 승패를 가르는 새로운 게임의 규칙이 되었고, 세계의 부를 배분하는 유일한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세계화에도 어느덧 종말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기후변화와 팬데믹, 디지털 전환, 패권 변동 등으로 기존과 같은 방..
최근 공동체 공론장에 낯선 단어, ‘페스코’가 등장했다. 11월 한 달 동안 진행한 ‘잡식가족의 딜레마’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젊은 남성 회원 한 명이 자신을 페스코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페스코는 ‘페스코 베지테리언’의 준말이고, 소·돼지·닭 등의 고기는 먹지 않되 우유·치즈·달걀, 그리고 해산물은 섭취하는 채식주의의 한 종류를 뜻하는 말이란다. 알고 보니 채식에도 여러 등급이 있었다. 완전 채식인 비건부터 락토, 오보, 페스코, 폴로 그리고 상황에 따라 육식도 하는 유연한 플렉시테리언까지. 나는 오랫동안 잡식주의자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잡식이 인간의 본성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트렌드가 되어가는 채식이, 유기농처럼, 처음 시작과 달리 건강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었고, 중산층 ..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2022 카타르월드컵 8강전이 열린 지난 10일(현지시간) 알코르의 알바이트 경기장 기자석에 미국 기자 그랜트 월의 영정과 조화가 놓여 있다. 알코르/로이터연합뉴스 어떤 기자이길래 데이비드 베컴과 백악관이 애도를 표하고, 각국 언론이 상세한 부음을 전했을까. 지난 9일 월드컵 8강전 취재 중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진 뒤 숨진 그랜트 월(1974~2022) 얘기다. 월은 미국의 스포츠 잡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축구·대학농구 담당 기자로 24년간 일했고, 2020년부터 독립 언론인으로 스포츠 보도를 했다. 초기 화제는 그의 돌연사 배후에 카타르 당국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혹 때문인 듯하지만, 사인은 과로사로 정리되는 분위기다. 폭넓은 애도는 그가 존경받는 기자였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