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전불응(給電不應). 전기를 공급하라는 명령에 응하지 않음. 재생에너지의 특징이다. 재생에너지 발전소는 오로지 자연조건이 허락될 때만 발전이 가능하고, 우리가 필요로 할 때 전력 생산을 보장할 수 없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재생에너지는 항상 동일한 용량의 예비발전기를 둔다. 재생에너지가 전력을 생산하지 못할 때 예비발전기를 가동해 전력을 공급하도록 하는 것. 따라서 재생에너지가 아무리 많이 공급된다 하더라도 동일한 예비발전소를 또 건설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재생에너지의 비싼 발전단가에 추가적으로 얹어지는 가격임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재생에너지가 원자력과 제로섬 관계에 있어 재생에너지가 늘어나면 원자력발전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재생에너지가 늘..
먼 훗날 21세기의 ‘시대정신’을 꼽으라면 우리는 어떤 사건을 제일 먼저 떠올릴까? 우리의 삶과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역사적인 사건은 어떤 것일까? 한 해를 보내면서 습관적으로 던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나는 주저하지 않고 ‘코로나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목할 것이다. 3년에 걸쳐 우리를 괴롭히고 이제는 끝날 조짐을 보이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과 여전히 어떻게 끝날지 오리무중인 우크라이나 전쟁이 우리에게 익숙한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코로나19 ‘이후’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화하고,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세계의 질서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 우리는 ‘이후’라는 뜻의 라틴어 낱말 ‘포스트’(post)를 접두사로 사용하여 수많은 미래사회의 모습을 ..
연말 검진 시즌이다. 12월 말까지 올해의 검진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요즘이다 보니, 진료실도 검사실도 바쁘다. 상(上)복부초음파 검사를 받는 사람들도 덩달아 많다. 상복부초음파는 말 그대로 복부 위쪽에 있는 장기들을 관찰할 수 있는 초음파 검사로, 간, 담낭, 양쪽의 신장, 비장, 췌장까지를 보는 검사이다. 복부초음파 검사를 하려면 검사자도 힘을 많이 써야 하지만, 수검자(검사를 받는 사람)도 힘을 많이 써야 한다. 장기가 최대한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해 12시간 이상을 물도 마시지 않는 금식을 하는 것이 좋음은 물론, 검사를 하는 동안에도 상복부에 있는 장기들이 갈비뼈 아래로 내려와 초음파 화면에 잘 잡힐 수 있도록 숨을 들이쉬고 배를 불룩하게, 최대한 내밀어야 한다. 숨도 계속 참아야..
“저물어가는 한 해를 알고 싶은가. 구렁으로 달려가는 뱀과 같도다. 긴 비늘이 반 넘어 들어갔으니, 가버리는 그 뜻을 누가 막으랴.” 소동파가 세밑 저녁을 보내며 지은 시의 첫 구절이다. 손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미끄러져 지나가버리는 한 해를 실감나게 묘사했다. 가는 세월을 붙잡지 못해 안타까운 작가는 제야의 북소리도 새벽닭의 울음도 달갑지 않고 그저 이 저녁이 끝나지 않기만 바라지만, 그런 마음을 알 리 없는 젊은이들은 밤새 웃고 떠들며 나이 한 살 더 먹었다고 자랑하더라는 내용이 이어진다. 신종 감염병의 대유행으로 몇 년간 자제해 왔던 온갖 모임들이 송년회(送年會)라는 이름으로 봇물 터지듯 이어지고 있다. 어차피 잡아둘 수 없는 시간, 반가운 이들과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서 잘 보내주자는 뜻으로 가지는..
가깝게 지내던 선배들이 정년을 맞아 회사를 떠나고 있다. 필자가 다니는 회사는 ‘주민등록상 만 60세가 되는 달의 마지막 날’이 정년퇴직일이어서 매달 퇴직자가 나온다. “30년 넘게 다닌 직장에서 해방됐으니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네지만 씁쓸하다. 변변한 소일거리조차 없는 백면서생 같은 이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물려받은 재산이 넉넉하거나 꼼꼼하게 노후 대비를 한 일부는 다를 것이다. 곧 내 차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별다른 대비는 하지 않으니, 필자도 백면서생류가 분명하다. 커다란 덩치의 ‘회색 코뿔소’가 달려오는 걸 그저 보고만 있는 것 같다. 통계청이 최근 내놓은 ‘2021년 생명표’를 보면 60세 한국인은 남자 23.5년, 여자 28.4년 등 평균 26년을 더 산다고 한다. 보통..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공영방송의 보도에 불만을 표시했다. KBS나 MBC를 보지 않는다는 말도 했다. 대통령이 되고 난 후 여당의 주요 인사들은 공영방송을 정파적이라며 비난했다. 임기가 남은 MBC 사장의 퇴진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KBS에는 감사가 시작됐다. 수개월이 지났지만 감사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이례적이다. 공영방송 사장이나 이사 선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송통신위원회도 정기 감사라 하지만 장기 감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것도 이례적이다. 게다가 방송통신위원회 감사 중 점수를 수정한 심사위원들을 검찰에 넘겨 압수수색까지 하는 등 수사가 진행 중이다. 심사위원의 판단이 달라지면 새 심사지에 수정하던 것을 해당 심사부터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기존 점수지에 수정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 ..
직장 일이 힘든 것에 비해 급여가 적어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면 한두 번 무단결근의 유혹을 느꼈을 것이다. 월급을 받으면서 이에 상응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직장에서 그에 따른 징계를 받으면 된다. 그런데 무단결근을 했다고 형사처벌을 받는다면? 더욱이 고용관계도 아니라서 어차피 출근할 의무도, 출근으로 변제할 대가(월급)도 없는 관계였다면? 국가에 의한 강제노역 아닐까. 이런 일이 지난주에 벌어졌다. 화물연대의 파업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은 업무개시명령을 내렸고 형사고발이 시작되면서 화물차주들은 정부의 강경한 대응에 밀려 다시 운송을 시작하게 되었다. 보수·진보 언론들은 차량유지비, 기름값을 빼고 월 500만원을 벌고 있는가, 200만원을 벌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건 핵심이 아니다. 월 500만원..
녹은 쓸쓸함의 색깔 염분 섞인 바람처럼 모든 것을 갉아먹는다 세상을 또박또박 걷던 내 발자국 소리가 어느 날 삐거덕 기우뚱해진 것도 녹 때문이다 내 몸과 마음에 슨 쓸쓸함이 자꾸만 커지는 그 쓸쓸함이 나를 조금씩 갉아먹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된 건물에 스며드는 비처럼 아무리 굳센 내면으로도 감출 수 없는 나이처럼 녹은 쓸쓸함의 색깔 흐르는 시간의 사랑 제때 받지 못해 창백하게 굳어버린 공기 김상미(1957~) 녹은 공기 중의 산소에 의해 산화, 즉 부식되면서 생긴다. 상온에 40% 정도의 습도가 필요하다. 철은 붉은색, 구리는 녹청색의 녹이 스는데 시인은 이를 “쓸쓸함의 색깔”이라 한다. 쓸쓸함은 혼자라는 외로움에서 찾아온다. 사랑의 부재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곁에 없어 느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