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하고 설거지하는 국회의원, 아이를 돌보는 장관, 음식물 쓰레기를 갖다버리는 검사. 밥하는 노동, 아동·어르신을 돌보는 노동은 우리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누군가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익숙한 모습인지. 예술분야로 주제를 바꾸어 메탈 밴드의 구성원들이 곡을 쓰고 연주를 하면서 노약자의 병원 가는 일정 등을 생각하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음악영화가 상영됐다. 지난주에는 하늘에 떠 있는 노란색 반달과 쏟아질 듯 하늘에 박혀 있는 별빛을 받고 청풍호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제9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개막작을 관람했다. 개막작은 프랑스 감독인 마르탱 르 갈의 이다. 이 영화는 15년 동안 ‘블랙 메탈(black metal)’이라는 이..
“성희롱은 집에 가서 하세요.” “그 남자가 직장에서 딱 자기 친딸 나이인 여성을 성희롱했다니까요.” “피해자를 타인이 아니라 내 딸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첫 번째 멘트는 몇 해 전 소위 한 스타강사가 C 언론사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에 가서 강의할 때 한 것으로 화제가 됐다. 또 “세상에나 자기 딸 나이의 여성을 성폭행했다니까요”는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듣는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에서 강사들이 남성들을 대상으로 할 때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다. 가장 설득력 있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가족관계를 왜곡할 수도 있는 발언이다. 실제로 성희롱 예방교육의 강사 말대로 성희롱이 가정에서 발생하고 있다. 여성가족부의 ‘2010년 가정폭력실태조사’에 의하면, 부부폭력의 한 유형인 성학대는..
나는 2010년 가을에 갑상샘암 수술 후 처음으로 혼자만의 여행을 갔다. 목적지는 제주도. 지인에게 추천받은 제주 동북부의 조용한 마을의 펜션에서 3박4일을 묵으며 혼자만의 ‘쉼’을 가졌다. 마음껏 게으름을 부리며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고 숙소에 딸린 카페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신 후 천천히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해변을 달렸다. 그러다가 쉬고 싶을 때 잠시 쉬고, 전복죽이 맛있어 보이는 식당이 보이면 식사를 하며, 푸른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몇 시간씩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편안한 시간을 가졌다. 지금도 삶이 팍팍하다고 느껴질 때 잠시 눈을 감고 제주도에서의 나른하고 편안했던 일상을 떠올리곤 한다. 바야흐로 여름휴가의 계절이 도래했다. 휴가의 성격과 위상은 역사적으로 다르게 구성돼 왔다. 우리나라 법..
2년여 전 낯선 동네에서 ‘어리바리’할 때 아버지의 조상 덕을 보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학원에 대한 정보도 없고 그냥 눈에 띄는 국어학원이 있어서 큰아이를 보내 보았고, 큰아이도 그럭저럭 흥미를 붙이며 재밌게 다녔다. 어느 날 내 아이랑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의 어머니가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그래도 정현이 엄마가 내 아이랑 같은 풍향 조씨니까 알려주는 거예요. 안 그러면 누가 이런 거 일하는 엄마들한테 알려줘요? 정현이가 지금 OOO 국어논술학원에 다닌다고 했죠? 거기는 한 10년 전까지는 괜찮았는데 지금은 별로예요. 그러니까 빨리 그 학원 끊어요. 어휴, 누가 이런 것 가르쳐줘!” 호주제도는 폐지됐지만 아버지 성은 잠시 나에게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고맙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마음..
나에게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몇 개의 강렬한 기억들이 저장돼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육아와 관련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5년도 더 지난 듯하다. 남편은 야근을 마치고 퇴근해 오전 9시경에 잠들었고, 나는 남편의 숙면을 돕기 위해 15개월 차이의 연년생인 두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둘째를 포대기에 업었고, 돌을 갓 지난 큰 아이는 유모차에 태우고 하루종일 하염없이 걸었던 기억.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위 자연의 시간에 노동시간의 리듬을 맞추며 살아가고 있다. 해가 뜨면 노동을 시작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한다. 그러나 해가 뜨면 퇴근하고 해가 지면 잠에서 깨어 출근 준비를 하는 사람들도 존재하고 있다. 고용노동부의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 기업 중 15.2%가 ..
“나에게 혼자만의 시간은 운전하여 출퇴근하는 때입니다.” “아침식사를 여유 있게 준비하기 위해서 30분 일찍 일어나서 줄넘기를 하고 있어요. 그때가 나만의 시간일까요?” 복잡하게 사람들과의 관계에 얽혀 있는 현대인들은 때때로 자기만의 시간을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자녀양육과 가사노동에 대한 책임을 주로 담당하고 있는 여성은 이 ‘혼자만의 시간’도 출퇴근하는 이동시간에 의미가 덧씌워진 것이다. 새벽에 줄넘기라는 운동을 하는 시간은 액면 그대로의 여가시간이라고 볼 수 있겠으나 그 의미를 캐보면 아침식사 준비라는 가사·돌봄 노동을 수행하기 위해 부수적으로 확보된 것이다. 그러나 남성들에게 ‘자기만의 시간’을 둘러싼 내용과 의미는 다르게 부여되고 있다. 여가의 의미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점점 대중화되고 있는 골..
“남성분들은~ 배려하며!” “여성분들은~ 뻔뻔(fun fun)하게!” 최근 뒤풀이 모임에서는 참석자들이 돌아가면서 건배사를 제안하기도 한다. 작년이었나 보다. 결국 피할 수 없이 내 차례가 다가오자 잠시 고민하다가 성별화되어있는 사회의 남성과 여성의 특성을 고려하여 건배사를 제안하였다. “남성분들은 ‘배려하며’, 여성분들은 ‘뻔뻔하게’ ”. 간신히 내 차례를 모면하고 자리에 앉았지만 왠지 찜찜하다. 만약 그 자리에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이지만 여성 성별정체성을 지닌 사람은 어떤 건배사를 외쳐야 했을까? 등등의 생각 때문에. 매년 7월1일부터 7일까지의 1주일은 여성주간이다. 여성주간은 생물학적으로 여성의 성기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을 위한 때일까? 소수일 수 있겠으나 생물학적인 성과 정신적 성이 일치하지 않은..
나는 2년여 전에 영구임대아파트 앞의 아파트로 이사를 오면서 흥미로운 광경을 목격했다. 동네산책을 하다가 휠체어 장애인들을 포함한 다양한 장애인들이 개천가나 공원 곳곳에 있는 모습을 보게 됐다. 더 나아가 초여름이 되니 동네 호프집의 파라솔 밑에서 휠체어 장애인들끼리 술잔을 기울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와 민영아파트 단지들이 있어 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이는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게 됐다. 미국에 유학 가는 친구의 송별회를 하기도 하고, 아버지가 몇 년째 교정시설에 입소해 있어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친구를 집에 데려와서 늦게까지 놀기도 한다. 이사와서 아이들에게 다양한 계층,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더불어 사는 지혜를 삶속에서 체득하게 한 것 같아 흐뭇하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