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관한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려 보면, 늘 떠오르는 곳이 있다. 도둑을 막기 위한 쇠꼬챙이 창살 너머 있었던 초등학교 도서관이다. 작기는 했지만, 창살 건너로 보이는 서가에는 꼬맹이의 눈에는 평생 읽어도 다 읽지 못할 정도의 책이 꽂혀 있었다. 짙푸른 색의 커튼 틈새로 들여다보면, 도서관 아니 도서실 안은 차분하다 못해 무거운 침묵만이 있었다. 나는 거기 한구석에 앉아 마냥 책을 읽고 싶었다. 문자의 배열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이야기와 이미지의 세계에 빠져드는 그 순간 결코 행복하지 않던 나날의 삶을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의 기억에 그곳은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어떻게 열린 적이 없었겠는가마는, 그것은 책을 읽는 학생들을 위해서는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가끔 헌책을 사면 그 안에 별것이 다 나온다. 책장과 책장 사이는 무언가 얇은 것을 숨기기 좋은 장소인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는 오래된 엽서를 본 적도 있고, 우표를 본 적도 있다. 꽃잎이나 나무 잎사귀도 흔하다. 여학생들이 그런 것들을 책갈피 사이에 넣어 두었다가 편지를 보낼 때 붙여 보내곤 했는데, 깜빡 잊어버리는 바람에 뒷날 헌책을 산 사람이 발견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내가 사는 해운대와 가까운 일광 쪽으로 갔다가 고물가게에서 책을 몇 권 샀는데, 그 책 속에서 일제강점기의 ‘우편저금통장’이란 것이 나왔다. ‘東萊郡機張面’ ‘大日本婦人會 機張面支部 貯金組合’이란 푸른 도장이 찍혀 있고, 안에는 언제 돈을 얼마를 저축했는지 적혀 있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지만, 한편 재미있는 것이라 싶어 ..
▲ 절판되거나 서점서 팔지 않는 책 빌려 보고서도 꼭 갖고 싶은 책 어렵사리 발견해 주문 넣고 나면 흡사 초등시절 소풍 기다리는 설렘 앞서 보수동 헌책방 골목 이야기를 했는데 이곳을 드나든 것은, 대학 다닐 때부터다. 나이가 꽤나 든 분이 하는 골목 초입의 작은 가게에는 약간의 한장본(韓裝本) 고서, 일제강점기 세창서관 등에서 나온 연활자본 책, 한의서 등을 팔고 있었다. 이 가게에서 지금 연구실 한 귀퉁이에 있는(거의 한 번도 보지 않은), 언해본, 사서(四書) 언해본을 구입했다. 서울로 가서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지금 있는 대학에 부임한 뒤 다시 책방 골목을 찾았을 때 그 영감님은 가게에 없었다. 아마도 돌아가셨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 가게도 지금은 예전에 팔던 책을 팔지 않는다. 보수동 책방 골..
이야기를 하다보니, 생각이 절로 난다. 이야기를 좀 해 보자. 집이 해운대에 있으니, 집에서 승용차로 3분이면 바닷가다. 기장을 거쳐 일광으로 올라가면 차가 드물다. 고리원자력발전소도 지난다. 서생에 접어들면 길가에 배를 파는 가게가 많이 보인다. 배 과수원이 많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휴일이면 아내와 함께 집을 떠나 동해안으로 올라갔다. 물론 저 멀리 강원도 동해안까지는 아니고, 구룡포까지 가면 가장 멀리 가는 것이다. 다른 목적은 없다. 간절곶에 가서 바닷가 바람을 쐬고 칼국수 한 그릇을 먹은 뒤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오다가 가끔 고물을 파는 가게에 들른다. 땅값이 싸서 그런지 군데군데 고물을 파는 곳이 있다. 고물이라 하는 것은, 이 가게의 물건들이 골동품이라 말하기는 어려운, 좀 그런 물건들이기 ..
▲ 불안하게 덩치 키우는 서울 조선의 흔적 빠르게 씻겨 나가 ‘서울사전’ 하나 만들고 싶다 박사과정에 들어가서 번역을 하는데, ‘자각(紫閣)’이란 말이 나왔다. 아무리 찾아도 알 수가 없었다. 경인 선생님(필자의 박사논문 지도교수인 임형택 선생님)께 여쭈어보았더니 “응, 서울을 자각이라 그랬어” 하신다. 그 뒤로 서울이란 오래된 도시에 관심이 쏠렸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서울의 장소성에 흥미가 생겼던 것이다. 공부를 하다보니 한문학사(史)에 이름을 남긴 사람은 거개 서울 사람이었다. 특히 조선후기가 되면 서울에서 벼슬하는 사람은 서울 사람이었다. 박지원과 박제가·이덕무·유득공 등이 어울려 살던 곳도 종로 백탑 부근이었고, 김창협과 김창흡(金昌翕) 등도 모두 서울 자하문 근처에 살았던 것이다. 또 ..
▲ 일제 때까지 베스트셀러, 시대별로 종류도 많았는데 이젠 스마트폰이 방대한 ‘한어대사전’을 삼켰으니… 친구가 스마트폰에서 기묘한 사전을 보여준다. 스마트폰 화면에 한자를 쓰면 곧 현재 가장 큰 한자 사전으로 알려진 의 해당 한자 항목이 뜨는 것이다. 엄청나게 편리하다. 10책이 넘는 사전이 스마트폰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말이 난 김에 사전 이야기를 해보자. 앞서 일제강점기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가 자전이었다고 했는데, 이건 상당히 놀라운 사실이다. 요즘은 어떤 사전도 베스트셀러에 들지 못한다. 생각해 보면, 일제강점기만 해도 여전히 한문을 읽었고 국문이라 해도 한자말투성이의 국한문 혼용을 했으니, 당연히 한자 자전의 수요가 많았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사전에 대한 수요가 이처럼 높았다면, 순전히 한문을..
‘삼천리’(제7권 제9호 1935년 10월1일) 잡지를 보니, 책에 관한 이야기가 더 있다. ‘서적시장조사기(書籍市場調査記), 한도(漢圖)·이문(以文)·박문(博文)·영창(永昌) 등 서시(書市)에 나타난’이란 기사가 그것이다. 이 기사를 통해 1935년 당시 경성, 곧 서울에서는 서적시장도 ‘꽤 활기를 띠고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나날이 번창하여져 가는 서울장안에는 안국동을 중심으로 삼고 관훈동을 뚫고 종로 거리로 나가는 좁은 거리와 창덕궁 돈화문 앞으로 내려오는 좁은 거리 등으로는 무수한 서점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날로 늘어가고 번창하여 감을 보게 된다. 약 5, 6년 전보다도 훨씬 서점들이 많아진 것을 바라볼 수 있는 현상이다.” 지금 지명과 꼭 같다. 종로 일대에 서점이 날로 불어나고 있..
보수동 책방골목 이야기를 하다가 일기 쪽으로 이야기가 흘렀다. 서점 이야기를 좀 더 해 보자. 어릴 적에 집에 책이 없다 보니, 가장 부러운 집은 책이 많은 집이었다.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의 집은 대본소였다. 학교 정문을 벗어나 조금만 가면 문방구를 파는 가게가 있었고, 가게의 한쪽 벽면은 책으로 가득하였다. 대본소를 겸했던 것이다. 책을 한없이 볼 수 있는 그 친구가 부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왜 그런 행운을 외면하는지 나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친구의 대본소에 갔더니 어떤 사람이 와서 책을 찾는데, 친구는 그 책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 모르고 허둥대었다. 내가 즉시 책의 위치를 손으로 가리키자 친구는 깜짝 놀라며 어떻게 아느냐고 되물었다. 그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