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초여름 대선 경선에 나온 야당의 한 후보가 ‘저녁이 있는 삶’을 주창했다. 이 때문에 설레던 이들이 꽤 많았지만 더 많은 돈을 욕망하느라 ‘삶을 삼킨 저녁’은 달라지지 않았다. 2년 전 가을 나는 이 지면에 ‘저녁은 이미 넘쳐나고 있다’는 칼럼을 썼다. 무연무업(無緣無業) 인구가 급증한 사회의 ‘넘쳐나는 저녁’엔 불안과 고독이 미세먼지처럼 가득했다. “완전히 다른 상상이 절실”하다고 글을 마쳤지만 돌아보면 상상은 태부족했다. 그러다 지난 5월17일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의 주점 화장실에서 살인 범죄가 벌어졌다. 5월28일엔 구의역 9-4지점 승강장에서 사망사고가 일어났다. 두 사건을 접하면서 ‘저녁이 있는 삶’에 대한 내 감정과 생각은 곤두박질쳤다. 구의역 9-4지점 승강장에서 홀로 안전문을 ..
잘 아는 교수님이 소설책을 번역해서 보냈다. 역자가 둘이다. 그분은 원래 부부 교수님인데, 한 분은 영문학자, 한 분은 역사학자다. 두 분이 번역했겠거니 했는데, 역자 중 한 사람은 아드님이란다. 참으로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행복하겠구나 싶었다. 책을 훑어보니, 한 페이지는 인쇄가 되어 있고, 한 페이지는 인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파본이다. 서점에서 산 책이라면 당장 바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증받은 책을 파본이라며 돌려보내고 다시 새 책을 달라고 한다면, 뭔가 좀 이상한 것 같다. 그래서 서가에 꽂아두고 내쳐 그냥 두었다. 뒤에 그 교수님을 만나 책을 보내주어 고맙다 하고 책의 상태가 그랬다고 하니, 깜짝 놀라면서 새 책을 보내주겠다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아니 파본이니까 그냥..
같은 대학에 근무하는 친구가 나더러 자기들 모임에 좀 나와 줄 수 없느냐고 부탁을 한다. 무슨 모임인가 물었더니 책읽기 모임이란다. 한 달에 한 번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모임으로 마침 내가 쓴 책을 읽고 토론을 할 예정인데, 그 친구가 저자가 친구라고 했더니 모임에서 불러서 같이 얘기를 해보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친구는 자연과학을 전공하고 그 모임 역시 같은 자연과학 전공자의 모임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문과 쪽 전공자들이 자연과학 쪽 지식을 결여하고 있듯,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분들은 대체로 인문학 쪽 관심이 희박하다. 같은 대학에 있지만 사실 딴 세계에서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의식적 노력도 있다. 친구의 모임은 주로 인문학 서적을 읽고..
조선시대 문인에 대해 공부를 하다 보면, 어떤 작품을 언제 썼더라, 이때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지 하는 의문이 든다. 꽤나 중요한 작품이어서 창작 연도를 꼭 알고 싶은데, 알 길이 없다. 이럴 때면 소상한 연보가 있었으면 한다. 물론 유명한 문인이라면 문집에 문인의 비문이나 행장 같은 것이 있어서 대충 그 사람의 생애는 알 수가 있다. 또 조금 더 유명한 인물로 벼슬을 했다면 이라든가 같은 관찬 사료에 이름이 나온다. 이것으로 참고할 수도 있다. 그래도 좀 더 자세한 것을 원할 수도 있다. 또 일반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유명한 학자, 정치인이라면 문집 끝에 연보가 있다. 이 경우 해당 인물을 이해하는 지름길을 만난 것 같다. 연보도 갖가지인데 내가 본 정말 상세한 연보는 다. 모두 4권인데, 약 60..
집안이 중요하다는 것은 다 안다. 누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에 관한 정보를 자연스레 모으게 되는데, 주로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를 먼저 따진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어떤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면, 먼저 이렇게 묻는다. ‘어느 대학 나왔는데?’ 실제 학벌이 그 사람의 사회적 위상을 정하는 카스트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고, 그것이 모두에게 깊이 내면화되어 있다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 전근대 사회로 가면 약간 다르다. 사람을 만나 정보가 없다면, 먼저 그의 집안부터 알려고 든다. 그가 어떤 성씨이며 어떤 파에 속하는지, 또 그의 직계는 어떤 관직에 있었는지 등을 묻는다. 박지원이나 정약용처럼 유명한 사람이라면 소용이 없지만, 이름을 듣고 금방 감이 오지 않는 사람이라면 족보를 찾아서 계보를 따져..
가장 감명 깊은 책은 쉽게 말할 수 없지만 가장 영향력이 있는 책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무슨 고전 같은 것을 말하느냐고? 그건 아니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책은 아마도 초·중·고 교과서일 것이다. 반박하실 분도 있을 것이다. 교과서라니?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답할 분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을 꼽을 것이다. 불교 신자라면 불경을, 드물지만 이슬람교 신자라면 코란을 꼽을지도 모르겠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작가의 소설을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마도 일시적인 감명일 수는 있지만 당신을 ‘만든’ 책은 아닐 터이다. 가장 엄청난 책은 당신 자체, 혹은 나아가 인간 자체를 만드는 책이다. 그 거룩한 책의 이름은 교과서다. 교과서를 좋아하는 사람..
중·고등학교는 물론이고 대학 입학 때, 그리고 직장에 들어갈 때 입학·입사 서류를 만들면 거기에는 반드시 취미란이 있었다. 적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공연히 적지 않으면 뭔가 불이익을 받을 것 같아 꼬박꼬박 채워 넣었다. 요즘도 그런 난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서류를 만들어야 했던 때는 주로 70, 80년대라 먹고살기 바쁜 가난한 시절이었다. 무슨 취미를 기를 여유가 있단 말인가. 또 대학생 때는 ‘음주’ ‘흡연’이 취미였지만, 그것을 그대로 쓸 수는 없었다. 제일 만만한 것이 ‘독서’였다. 이야기가 옆으로 새지만, 이제는 담뱃값이 올라 흡연의 즐거움도 쉽게 누릴 수가 없는 형편이 되었다. 어쨌거나 왜 남의 취미는 묻는단 말인가. 나는 취미란의 취미들이 어떤 효용가치가 있는지 지금도 모른다. 취미가 독..
사십 대 중반을 지나면서 몸에 큰 고장이 났다. 한동안 병원신세를 진 것은 물론이다. 퇴원해서 집에서 요양하면서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였다. 꼬박 1년 반을 집에서 보냈다. 의사 선생의 지시는 책을 보지 말고 무조건 쉬란다. 책을 보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 아예 볼 수가 없었다.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란 누워서 TV를 보는 것이다. 대한민국 TV가 얼마나 볼 것이 없는지는 일주일 만에 뼈저리게 깨우쳤다. 어느 날 선배 교수님께서 경과가 어떠냐고 전화를 하셨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너무나 무료하다고 했더니, 웃으시면서 비디오방에 가서 무협비디오나 빌려다가 보라고 하신다. 그냥 소일거리로 켜 놓고 있으란다.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생각도 말고 그냥 시간을 보내는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