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다. 구한말에 관심이 많아서 ‘대한자강회보’ 등의 잡지며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만세보’ 등 신문을 읽었다. 이쪽은 지금은 연구자가 꽤 있지만 당시에는 관심을 갖는 사람이 드물었다. 학위 논문을 쓴다 해도 별반 읽어주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그때 조선 후기 역관이나 의관 등 기술직 중인과 서울 관청의 하급관리인 서리가 주축이 된 한문학에도 관심이 있어 자료를 읽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여항문학 쪽이 나을 것 같았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여항문학 방면의 최초이자 대표적 저술로 구자균의 가 있다. 이 책은 원래 구자균의 경성제국대학 조선어학과 졸업논문이다. 요즘 대학에도 졸업논문 쓰는 관행은 남아 있다. 하지만 대부분 베끼기로 일관하기에 별 의미가 없다. 그런데 그 시..
사회적·정치적 격변은 책을 재로 만들고, 흩고, 옮기고, 다시 모이게 한다. 조선시대 역모 사건이 나면 책은 흩어지고 옮겨지고 다시 모였다. 실학자로 유명한 유수원(柳壽垣)이 1755년 나주괘서 사건으로 역적으로 몰려 죽자, 그의 책은 홍봉한(洪鳳漢)의 차지가 되었다. 이렇듯 거대한 정치적 사건은 책을 흩고 옮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책을 소멸시키고 흩고 옮기고 다시 모으는 것은 전쟁이다. 조선의 책은 임진왜란 때 한 번 소멸되었다. 이후 책에 크나큰 액운이 된 전쟁은 말할 것도 없이 6·25전쟁이다. 유명한 장서가들의 회고담을 보면 반드시 6·25전쟁 이야기가 나온다. 앞서 의 원본을 소장했던 최남선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최남선은 6·25전쟁 당시 서울 우이동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장서 역시 ..
동아일보 1959년 10월15일부터 11월11일까지 이병기 등 13인의 장서가를 찾아 그들의 서재를 소개하는 글이 실렸다. 1. 이병기 매화옥서실(梅花屋書室) 2. 박종화 파초장서실(芭蕉莊書室) 3. 이희승 일석서실(一石書室) 4. 김상기 독사연경지실(讀史硏經之室) 5. 최현배 노고산방(老姑山房) 6. 김원룡 삼불암서실(三佛菴書室) 7. 이병도 두계서실(斗溪書室) 8. 황의돈(黃義敦) 해원루서실(海圓樓書室) 9. 윤일선 동호서실(東湖書室) 10. 안인식 미산서실(嵋山書室) 11. 김두종 양당서실(兩堂書室) 12. 양주동 무애서실(無涯書室) 13. 김용진 향석서실(香石書室). 국문학자(이병기), 국어학자(이희승·최현배·양주동), 사학자(김상기·이병도·김원룡·황의돈·김두종), 의사(윤일선), 유학자(안인식)..
어떤 교수의 연구실에 들렀더니 참으로 멋이 있었다. 책이 꽉 차 있지는 않았지만, 텅 빈 곳은 아무 곳도 없다. 한쪽에는 중국인 친구에게 선물로 받았다는 산수화가 걸려 있고, 또 작지만 좋은 글씨 족자도 드리워놓았다. 베이징 유리창(琉璃廠)에서 구입했다는 낙관도 여러 개 서가에 얹어놓았다. 책도 그저 그런 책이 아니라, 중국에서 수입한, 책갑(冊匣)에 넣은 책, 우리나라 고서 등이 이곳저곳에 있어 무언가 고색창연한 분위기가 감돈다. 더 둘러보면 붓글씨를 쓰는지 벼루와 연적, 필가(筆架)도 있고 먹으로 얼룩진 천도 있다. 향로도 있고 다관(茶罐)을 놓은 다포(茶布) 근처에는 찻물 자국이 진하다. 선비다운 서재의 모습이다. 주인의 인격도 아마 고아(古雅)하리라 짐작이 된다. 옛날 선비들의 서재는 어떠했을까?..
양주동이 방종현 등에게서 빌려본 책은 요즘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영인본으로 제작되어 어지간한 학자들의 연구실, 서재에는 구비되어 있는 것이다. 소장하고 있지 않아도 도서관에 신청하면 금방 빌려볼 수 있다. 하지만 양주동이 향가를 연구할 무렵에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양주동은 최남선이 책을 빌려준 데 대해 감사를 표했지만, 사실 최남선이 책 인심이 후한 편은 아니었다. 아니 도리어 인색했다고 말할 수 있다. 김춘동 선생은 에 ‘취 하여’란 글에서 ‘육당(최남선)은 진본을 찾으면 널리 알리거나 동학과 더불어 함께 보기를 꺼려 하는 성벽이 있는 듯했다’고 말했다. 점잖은 분의 조심스러운 표현이 이럴 정도면, 희귀한 책이 있으면 자랑만 잔뜩 하고 절대 빌려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최..
무애 양주동의 는 수주 변영로의 과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음주기로 꼽힌다. 두 책을 읽으면 ‘낭만적 음주’의 절정을 보는 것 같다. 게다가 의 자존자대, 곧 허풍은 도리어 얼마나 진솔한가. 두 사람은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뒷날 행로는 아주 달랐다. 변영로는 시인으로 언론인으로 살았지만, 양주동은 국어학자가 되었던 것이다. 국어학자 양주동은 여러 저작을 남겼지만 향가를 연구한 를 제외하면 모두 자장귀 같은 것이다. “어려서부터 야망이 오로지 ‘불후의 문장’에 있었고, 시인·비평가·사상인이 될지언정 ‘학자’가 되리란 생각은 별로 없었던” 양주동이 국어학자가 된 것은 일본인 학자 오쿠라 신페이 때문이다. 향가는 알다시피 에 실려 있다. 이 귀중한 신라의 노래는 향찰로 쓰여 무슨 말인지 알아먹지 못한다. 최초로..
책이 점점 불어나면 저 방으로 옮겨다 쌓는다. 아이들이 자라서 서울로 떠났으니 빈방이다. 책장을 사서 벽면에 가득 채우고 거기에 넘쳐나는 책을 꽂는다. 한참 지나면 그것도 모자란다. 다시 방 하나를 비우고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그럴 때마다 버리는 책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거기 딸려서 오만 가지 종이뭉텅이, 문서 따위가 나온다. 책을 옮기다가 오래된 상자 하나를 열었더니, 정말 가관이다. 옛날 노트, 자료를 옮겨 적은 카드, 발표문 요지, 그리고 논문 복사한 것이 쏟아져 나온다. 가장 양이 많은 것은 역시 논문이다. 스테이플러로 세로로 세 번 찍고 맨 앞면에 논문이 실린 잡지 이름을 붉은 글씨로 적어둔 것이었다. 20대 중·후반 석·박사 과정 때 복사해서 정성껏 제본한 것과 30대 중반 책을 쓰기 ..
18세기 이후 조선 지식인들의 저술을 보면 갑자기 그 양이 많아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산의 엄청난 양의 저술이 대표적이며, 다른 학자들도 다산만큼은 아니지만 결코 그 지적 노동의 양이 적지 않다. 서유구의 같은 책도 오랜 시간이 소요된 엄청난 분량의 저작이다. 정조의 문집 역시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저술의 양이 불어난 이유를 궁리하다가 안경이 도입된 것도 중요한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조선 지식인들이 즐겨 보던 중국책들은 글씨가 작은 것이 많았는데, 이것은 노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안경은 임진왜란 이후 북경에서 수입되기 시작해 18세기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사용되었으니, 아마도 안경의 보급이 보다 많은 책을 볼 수 있게 하고, 많은 저술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이처럼 테크놀로지의 발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