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것 같을 때면 어디 섬으로 가고 싶다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결별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떻게 죄짓고 어떻게 벌받아야 하는지 힘없이 알 것 같을 때는 어디든 무인도로 가고 싶다 가서, 무인도의 밤 무인도의 감옥을, 그 망망대해를 수혈받고 싶다 어떻게 망가지고 어떻게 견디고 안녕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그만 살아야 하는지 캄캄히 다 알아버린 것 같은 밤이면 반드시, 그 절해고도에 가고 싶다 가서, 모든 기정사실들을 포기하고 한 백 년 징역 살고 싶다 돌이 되는 시간으로 절반을 살고 시간이 되는 돌로 절반을 살면, 다시는 여기 오지 말거라 머릿속 메모리 칩을 그 천국에 압수당하고 만기 출소해서 이 신기한 지옥으로, 처음 보는 곳으로 두리번두리번 또 건너오고 싶다 이영광(..
낡은 유모차가 살구나무 아래 서 있구요 지팡이와 털신이 뜰팡에 기대어 있습니다 살구가 한 소쿠리 담겼구요 처마 아래 신문지와 골판지가 쌓였습니다 살구를 소쿠리에 담아 샘에서 씻은 유모차가 천천히 마당을 지나 툇마루에 앉습니다 깡마른 두 발이 문턱을 먼저 넘어오고 이어서 무릎걸음으로 퀭한 얼굴이 밖으로 나옵니다 좀 잡숴봐, 이래 봬두 달아 살구꽃이 피었다 지고 풋살구가 열리고 연두에서 노랑으로 익어가는 동안 낙상이 있었고 119구급차가 두어 번 다녀갔지만 그런대로 아직은 지낼 만합니다 송진권(1970~) 어머니는 몸이 불편해 유모차를 밀고 다닌다. 헐고 너절하게 된 유모차는 늘 살구나무 아래에 서 있어서, 살구나무에 꽃이 오고 풋살구가 열리고 살구가 노랗게 익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왔다. 그리고 오늘은 생긴 ..
이 세상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가자, 해서 오아시스에서 만난 해바라기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겠으나 딱 한 송이로 백만 송이의 정원에 맞서는 존재감 사막 전체를 후광(後光)으로 지닌 꽃 앞발로 수맥을 짚어가는 낙타처럼 죄 없이 태어난 생명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지는 성모(聖母) 같다 검은 망사 쓴 얼굴 속에 속울음이 있다 너는 살아 있으시라 살아 있기 힘들면 다시 태어나시라 약속하기 어려우나 삶이 다 기적이므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사막 끝까지 배웅하는 해바라기 김중식(1967~) 혹여 비라도 오면 “한 호흡으로 1년 치 폐활량을 들이켜고는/ 또다시 속타는 잠을 잔다”는 사막에 한 송이의 해바라기가 기적처럼 서 있다. 오직 한 송이만 서 있지만 백만 송이의 꽃이 핀 정원에 버금가는 존재감이다. 해바라기의 배광..
달빛이 곤히 잠든 엄마 등을 적실 때 그냥 엄마하고 부르고 싶을 때가 있다 부르지는 못하고 그냥 곁에 누워본다 곁에 가만히 누워 곁에 혼자 자고 있는 강아지를 바라보다 너에게도 엄마가 있었구나 또 자리를 옮겨 그 곁에 누워본다 문동만(1969~) 밝고 고운 달빛이 내리고 있다. 고단해서 깊게 잠든 엄마의 등 위로 달빛이 내리고 있다. 엄마의 몸에 흰 달빛이 흥건하다. 엄마하고 부르려다 엄마 곁에 나란히 누워본다. 말없이 그냥 그렇게 해본다. 아무런 조건 없이. 그냥 엄마가 좋은 것처럼. 엄마 곁에 누운 마음이 뿌듯했을 것이다. 그리고 곁에 혼자 잠든 강아지에게 눈길을 준다. 강아지에게도 엄마가 있을 테지. 괜히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서 강아지 곁으로 가 강아지 옆에 가지런히 누워본다. 강아지의 마음을 다 ..
나의 스승은 바람이다 바람을 가르며 나는 새다 나는 새의 제자가 된 지 오래다 일찍이 바람을 가르는 스승의 높은 날개에서 사랑과 자유의 높이를 배웠다 나의 스승은 나무다 새들이 고요히 날아와 앉는 나무다 나는 일찍이 나무의 제자가 된 지 오래다 스스로 폭풍이 되어 폭풍을 견디는 스승의 푸른 잎새에서 인내와 감사의 깊이를 배웠다 자작이여 새가 날아오르기를 원한다면 먼저 나무를 심으라고 말씀하신 자작나무여 나는 평생 나무 한 그루 심지 못했지만 새는 나의 스승이다 나는 새의 제자다 - 정호승(1950~) 우리를 이끌어주지 않는 것은 없다. 바람과 새와 나무도 우리를 가르치는 스승이다. 바람과 새는 높다. 푸른 하늘로 올라간다. 여름날 분수처럼 위로 세차게 솟는다. 산봉우리보다 구름보다 한층 높은 그 높이에서..
옥수수밭에 들어가면 옥수수밭이 되고 싶어요 옥수수밭에 옥수수가 커졌어 아가야, 옥수수밭에 들어가보렴! 옥수수밭에 들어가서 옥수수가 되어보렴 너풀거리는 이파리는 소낙비와 마주하는 7월의 검푸른 영혼일 거야 김명수(1945~) 옥수수밭에 옥수수가 커가는 때이다. 7월의 옥수수밭에 가봐야겠다. 옥수수는 치아를 꽉 깨물고 커가고 있을 것이다. 웃을 때에는 튼튼하고 하얀 치아가 잘 드러날 것이다. 옥수수밭에 들어가서 옥수수가 되고 싶다. 점점 커가는 옥수숫대는 장수처럼 얼마나 의젓하고 당당하던가. 바람이 불어올 때 옥수수밭에 들어가서 옥수수 이파리들이 서걱대는 소리를 듣고 싶다. 옥수수밭을 지나가는 바람을 ‘옥수수바람’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박용래 시인이 ‘앵두, 살구꽃 피면’이라는 시에서 “앵두꽃 피면/ 앵두바..
마지막 뉴스가 끝나면 한쪽 귀를 접습니다 뜨거운 수증기로 얼굴을 지웁니다 세수를 하면 자꾸 엄지손가락이 귀에 걸립니다 나는 조금만 잘 지냅니다 검은 양복을 차려입을 때만 나를 믿는 사람들은 각자의 TV 속에 손을 넣고 실을 뽑아 나누어 가집니다 불행은 정시에 시작됩니다 투명한 파문을 만듭니다 소문들이 쏟아져 내립니다 마이크는 얼굴을 편애하지 않습니다 거미는 먹이의 얼굴을 보지 않습니다 이상협(1974~) 이상협 시인은 현직 아나운서이다. 이 시는 정시에 뉴스를 전달하는 사람의 속내를 말하는 듯하다. 뉴스가 사실을 곧이곧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통제되던 시대가 있었으니 아나운서는 그럴 때마다 고통스럽고 무력감을 느꼈을 것이다. 게다가 뉴스로 인해 공통의 의견이 태어나기도 하고, 편견과 분열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이문재(1959~) 모든 것의 처음은 사소하고 미약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거기서부터 쌓이고 쌓인다. 쌓여서 육중한 무게와 너른 넓이를 만든다. 쌓이면 누구도 꺾을 수 없다. 다발과 묶음과 무더기는 어떤 힘도 견뎌낸다. 마치 서로 의지한 갈대 묶음을 힘센 사람도 쉽게 부러뜨릴 수 없는 것처럼. 지금 여기가 맨 끝이라고 여기는 때가 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