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은 고달프다. 내가 속한 사회와 내가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부적응자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어쩌다 보니 여기에 태어나 살게 되었는데 가면 갈수록 나와 이 사회 간의 간극은 커져만 가고 있다. 그것을 매일 같이 목도하면서 생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사회적인 동물인 하나의 영장류로서 어떤 그룹의 안정된 구성원으로 살고 싶은 심리는 우리의 내재된 본능이다. 동종의 개체들과 어울려 털 고르기도 하고 이도 잡아주면서 나도 이 무리의 어엿한 멤버임을 즐기는 것. 그것이 잘되지 않을 때 인간은 힘들다. 가령 고속버스를 이용할 때마다 나는 타기 전부터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과연 얼마나 시끄러운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자리할지, 이번엔 몇 명이나 휴대폰을 진동으로 해놓지 않고 연신 카톡 소리..
어느 날 오후였다. 나는 지하철 입구로 나오는 에스컬레이터에 오르고 있었다. 지면과 시선이 점점 가까워오자 왼쪽 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비둘기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무슨 볼 일이 있는지 녀석은 종종걸음으로 전진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동선은 느린 속도로 올라가고 있는 나의 궤적과 몇 초 후면 만나게 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평소에 더럽고 징그럽다며 멸시당하는 불쌍한 비둘기를 놀라게 하기 싫었던 터라 나는 순간 멈칫 했다. 하지만 자동계단인지라 멈추지 못했고 비둘기와 정면충돌이 불가피한 순간이 다가왔다. 휙. 해결책은 간단했다. 마지막 순간에 나의 존재를 알아차린 비둘기는 ‘뒤로 돌아’ 동작을 신속하게 취하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나는 머쓱하게 그의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양보하고 싶었는데...
모르고 그랬는데요. 학창시절에 가장 많이 듣던 말이다. 뭔가를 잘못하다가 걸려서 선생님께 불려 나갈 때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던 변명이다. 사실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의 옵션이 많지는 않다. 대충 둘러대는 것도 방법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핵심 내용은 몰라서였다는 것이 된다. 만약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조금이라도 알면서 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간 큰일이다. 그것만큼 뻔뻔스럽고 반항적이고 틀려먹은 자세가 또 있을까! 가장 강력한 처벌을 받는 지름길일 뿐이다. 반드시 무지한 상태에서 저지른 것이어야만 좀 혼나더라도 넘어갈 수가 있다. 몰랐다고? 그래, 그럼 다음부터 잘해. 가봐. 하지만 정말 그럴까? 잘못을 자랑이라도 하듯 너무 당당한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실은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게 ..
도시는 끝을 향하고 있다. 한 해 동안 펼쳐졌던 세상사의 드라마들은 각각의 줄거리를 모두 전개하고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 부산함과 복잡함, 욕망과 긴장으로 줄곧 들떴던 이곳의 공기에 모처럼 차분한 기운이 깃들어 있다. 왁자지껄 연말 모임들은 떠들썩하게 밤을 밝히지만 송년의 행위가 끝난 이들의 이완된 눈동자와 어깨에는 고단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지금은 마지막을 기리는 축제 기간이다. 새 일일랑 벌이지 말고 옛일을 봉합하는 데 집중하는 시간이다. 끝을 응시하라. 여기까지 무사히 도달한 여정을 돌아보라. 생존에 안도하고 완주의 기쁨에 동참하라. 계절이 바뀌고 명절도 지나 정녕 새로운 시점이 도래할 때까지 숨고르며 이 말미의 평온함을 음미하라. 한 해가, 다사다난의 또 하나의 덩어리가, 막 떠나고 있다. ..
갑자기 겨울이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아직 늦가을이라고 우길 거리가 약간이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모든 애매함이 사라진 명백한 겨울이다. 두꺼운 옷가지로 둘러 싸맨 사람들의 입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자주 들려온다. “왜 이렇게 추워?” 추위이든, 더위이든 날씨에 대한 반응은 ‘왜’로 시작되는 의문문이다. 이것은 우리 언어문화의 독특한 면 중 하나이다. 영어로는 좀 강조를 한다고 해도 “It’s so cold!” 정도이지, 왜라고 하늘에다 다그치지는 않는다. 모든 국민이 마치 대기과학에 비상한 관심이라도 있는 듯 기상현상의 원인을 따져 묻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이 질문에 답을 구하는 이도, 진짜 질문의 의도를 가지고 내뱉는 이도 없다. 하지만 우리말의 이 버릇 속에는 생각보다 많은 의미가 숨어있을지도..
모처럼의 휴가를 맞이해서 어딘가로 떠나는 여행. 그 여정 속에서 나는 자리 앞에 비치된 잡지를 하나 펴든다. 이국적인 꿈의 행선지가 소개된 기사들을 천천히 음미하며, 언젠가 나도 저곳에 가보겠지 야무진 다짐을 해보기도 한다. 광고조차 탐독하며 음미하지만, 한 가지에서 늘 눈살이 찌푸려진다. 뭔고 하니, 한국에 대한 글이나 사진의 비현실성을 마주했을 때이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여유와 풍류가 넘치는 문화와 사회, 전통과 현대의 자연스러운 조화, 잘 보존된 태곳적 자연 등등. 이건 현재 내 나라의 얘기가 아니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닐지언정 적어도 대표성을 지닌 묘사는 분명히 아니다. 굳이 추한 면을 내세울 것도 없지만, 줄기차게 우리의 극히 일부분이나 과거만을 추려서 선전할 노릇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이..
한때 이과 계통의 대학원을 다니던 동생이 자주 늘어놓던 푸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 중 하나는 고가(高價)의 분석 장비가 잘 돌아가는지 살피는 일이었는데, 그저 옆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한두 가지 기본적인 단추를 조작하거나 계기판을 보면서 혹시 문제가 일어나면 전문 기사에게 연락을 돌리는 일 정도였다. 보통은 아무 일도 안 일어나기 때문에 그야말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어딘가에 불이 켜지면, 무의미한 존재로서의 오랜 침묵을 깨고 기계를 돌보는 역할을 잠시 발휘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 어떤 능력이나 기술과 무관한, 그저 살아있기만 하면 되는 역할일 뿐이었다. 내 동생과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기분을 잘 안다. 너무나도 단순한 노동을 하는 그 지루함과 무료함과 ..
재작년에 일어난 일이다. 내가 사는 집 앞에는 작은 녹지가 하나 있다. 제대로 된 마당이라고 할 수는 없는, 몇 그루의 나무와 관목으로 꾸며진 얇은 녹색 띠에 불과하다. 조경업자들이 인공적인 시각과 방법으로 조성한 녹지가 다 그렇듯, 이렇다 할 생물이 발붙이고 살 만한 곳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따금씩 찾아오는 이들이 있고, 그중에서도 내가 애타게 기다리는 방문자가 있다. 바로 둥지를 틀러 오는 새들이다. 오목눈이들은 그저 놀다 가기만 하고, 어치 한 쌍이 집을 보러 왔다가 마음에 썩 안 차는지 연락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멧비둘기 부부가 찾아왔다. 거실 창문 바로 앞 나무에서 조류 새댁의 움직임이 점점 부산해지더니, 며칠 후에는 둥지의 기틀 같은 것이 나무 깊숙한 곳에 만들어졌다. 새들이 이사를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