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커피 한 잔, 또는 시원한 아이스티가 절실한 순간. 마침 카페 하나가 눈에 띈다. 하지만 난 문을 여는 대신 꾹 참으며 발길을 돌린다. 에이, 차라리 안 마시고 말지. 이미 수차례의 경험 끝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음료를 받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간혹 나의 요구가 의외로 수월하게 관철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거의 모든 카페에서 일회용품을 최소화한 주문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투쟁에 가까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업소 안에서 마실 거니 머그잔에다 담아달라고 하지만, 아예 비치가 안 되어 있는 경우가 다반사, 있다 하더라도 음료에 따라 잔의 용적이 다르다며 거절당하기도 한다. 양의 손해를 봐도 좋으니 그리 해달라고 고집을 피우면 바리스타의 진한 불쾌감을 피할 수 없다. 머그잔의 요구가 ..
한국어에 있는 말 중에서 외국어로 정확하게 옮기기가 어려운 단어가 간혹 있다. 가령, ‘여유’라는 말에 꼭 맞는 영단어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간이나 공간의 여유와 같은 물리적인 개념을 영어로 표현할 때는 그나마 가능하지만, 생활의 여유와 같은 용법으로 쓰일 때는 직역이 거의 불가능하다. 일대일 대응이 되는 단어를 찾는 대신 대충 풀어서 쓰면 물론 의미는 전달된다. 하지만 말이라는 것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못지않게 그 표현의 맛과 느낌도 중요하다. ‘멋’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의복의 멋이야 ‘스타일’로 대체하면 되지만, ‘멋을 아는 사람’이라 할 때는 딱 맞는 영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평소 사용하는 어휘 중 이런 말이 많은 사람은, 외국 사람과 얘기할 때 말문이 툭툭 막히는 경험을..
하루를 돌아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나는 틈틈이 공원에서 산책을 즐긴다. 마음 같아선 이야기책에 나오는 예쁘고 작은 오솔길이나 탁 트인 들판에 나가 홀로 호젓하게 걷고 싶지만, 도시에 살면서 내 구미에 딱 맞는 자연을 찾기란 지나친 욕심이다. 이 빌딩 천지에 간간이 주어진 녹지라도 사실 감지덕지다. 어떻게 이 땅만큼은 시멘트로 숨구멍이 막히지 않을 수 있었는지, 때로는 신기해하며 천천히 한 걸음씩 옮겨본다. 오늘 난 뭘 잘하고 뭘 못했더라…. 그런데 정신 집중이 잘되질 않는다. 복잡한 인간사를 피해 찾아온 곳인데 생각만큼 충분한 피난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원이란 단지 건물이 없는 공간이 아니라, 인공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야생의 자연을 얼마라도 대표하는 곳이라야 한다. 쫓기고 쫓겨 마지막 살 ..
비행기를 탈 때 많이들 심심풀이로 보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행인에게 장난을 치고 그 반응을 몰래카메라로 보는 내용이다. 가령 길을 묻고선 알려준 방향 정반대로 가는 식이다. 사람들이 놀라거나 당황하는 반응이 계속 반복되는데도 시청자들은 이를 즐긴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순진하고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즐거움을 느낀다. 인간적인 모습이라고나 할까? 누군가 실수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몸이 다칠 정도가 아니라면, 친구가 넘어질 때 우리는 하나같이 깔깔댄다. 사실 생각해보면 넘어지는 것 자체가 그렇게 재미날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누군가의 실수는 언제나 사람들의 웃음을 유발하고 때로는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준다. 냉철한 줄만 알았던 이가 예기치 못한 실수..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창밖을 바라보라. 바깥세상은 저토록 모진 풍파에 시달리지만 실내에 있는 나는 아늑하고 안전하다. 그건 좋은데 이따금씩 어떤 걱정이 들 때가 있다. 이 궂은 날씨 속에서 다른 동물은 과연 어떻게 지내는지 염려가 되는 것이다. 비를 피하기라도 하는 걸까, 바람에 실려 원치 않은 여행이라도 하는 건 아닐까. 언제나 바깥에 있어야 하는 삶은 어떨지, 견고한 은신처에 숨어 지내는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야생의 생활에 적응된 동물들은 물론 제 나름대로의 대처 방안을 가지고 있다. 땅에 굴을 파고 들어가 있거나, 잎이 풍성한 나무속으로 피난을 가기도 한다. 사람들과 가깝게 사는 종은 처마 밑이나 지붕 틈새 등 인공 구조물을 이용할 줄도 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모든 동물이 험한 날씨로부터..
우리가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들은 전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말이 있다. 10년 이상에 이르는 학창 시절 동안 배우는 거야 많지만 인간으로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을 배우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것은 대체 무엇인가? 야생학교의 설립자로서 나는 거리낌 없이 선언한다. 인간이 배워야 하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다른 생명과 사는 법’이다. 꺅!! 길거리를 걷다 외마디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치한인가? 유명 연예인이 나타났나? 아니면 누군가 복권이라도 당첨된 건가? 아니다. 소리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려보면 불쌍한 비둘기 한 마리와 그로부터 최대한 멀리 가려는 여성 한 명이 눈에 띈다. 비둘기가 무슨 외계 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니 차마 입에 담을 수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