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일본 정부의 태도에 세계는 분노하고 있다. 군위안부 강제동원이나 난징대학살과 같은 끔찍한 사건을 일으킨 것도 모자라 아예 그런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뻔뻔스러움에 우리는 아연실색한다.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반성의 결여만큼 사람들의 폭발적인 분노를 사는 일은 없다. 그런데 반인륜이라는 말이 사람 인(人)자를 쓰기 때문일까? 어쩌면 인간과 과거사에 치중한 나머지 지금 눈앞에서 버젓이 벌어지는 홀로코스트에도 우리는 충격적일 정도로 무덤덤해져 있다.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면 내 주장은 이미 증명된 셈이다. 이 참담한 광경을 얼마나 더 봐야 이에 응당한 분노를 느낄 것인가? 그저 행정적인 ‘처분’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당하는 이 대학살은, 이 시대의 가장 검은 비극이자 소위..
서울 시내에서 아직도 곤충 채집이 가능하던 시절, 우리는 포충망을 메고 공원을 탐험하며 여치, 땅강아지, 풍뎅이 등을 잡곤 했다. 일부는 집에 데려가 키우기도 하고 일부는 좀 보다가 그 자리에서 놔주었다. 돌이켜보면 멀쩡히 잘 사는 녀석을 괜스레 잡아와 좁은 수조 안에서 여생을 보내게 한 일들이 무척 죄스럽게 느껴진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그런 종류의 취미를 모두 그만두었고, 자유를 누리는 생물을 관찰하는 재미만을 추구하기로 했다. 한때 동물에게 못할 짓을 하던 나였지만, 그것도 주변의 몇몇 아이들에 비하면 매우 신사적인 편이었다. 손가락으로 잠자리의 머리를 튕겨 날리고, 나뭇가지로 송충이 꼬치를 만들고, 개미굴에 약을 붓고 기어 나오는 족족 눌러 죽이던 아이들의 잔인무도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사실 그렇..
최근 몇 주 동안 한국에서 가장 많이 내뱉어진 단어를 집계해본다면 아마 ‘추워’가 단연 1위가 아닐까. 이사갈 때 유리잔이 깨지지 않도록 감싸듯이, 칭칭 둘러매어 완전무장한 이들의 깊숙이 숨겨진 얼굴은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모자와 장갑, 내복과 문풍지로 달성하고자 하는 단열과 보온은 겨울철의 기본 대응책이다. 외부 기후와 관계없이 체온을 한결같이 유지해야 하는 정온동물의 운명은 어쩌면 이리도 가혹한가. 안에서 아무리 덥게 해놔도 밖에 나가자마자 추위를 타는 이 신체가 야속하기만 하다. 가만, 동물이라고 했겠다. 나만 따뜻하면 그만인 수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고개를 들어 창문 너머의 세상을 헤아려본다. 잔뜩 껴입고 난방기 바로 옆에 앉은 나도 오들오들 떠는데, 대체 밖의 녀석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며 나는 집을 나선다. 조금 춥긴 하지만 옷깃을 여미고 씩씩하게 걸으며 하루를 힘차게 시작해본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와 지하철은 사람들로 붐빈다. 콩나물시루처럼 운반되는 것이 대단히 유쾌하진 않지만 대도시에 사는 이상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교통체증도 참을 만하다. 그런데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고 여지없이 나의 아침을 망치는 것이 하나 있는데, 뭔고 하니 바로 성형수술 광고다. 불행히도 한국의 성형수술 메카인 서울 강남 및 압구정 일대를 자주 통과해야 하는 나로서는 매일 아침마다 이 저주스러운 기운으로부터 벗어나려고 곤욕을 치른다. 하지만 역부족이다. 대문짝보다 훨씬 큰 광고판은 지하도 양쪽을 도배하고 그 기괴한 눈과 코를 내게 들이민다. 눈을 감아 시각정보를 차단..
와! 함성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몰려든다. 커진 눈망울은 호기심을 충족하느라 여념이 없고, 들뜬 몸은 가만있질 못하고 왔다갔다 부산스럽다. 수족관이나 과학박물관, 생물체험관 같은 곳에서 주말마다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어쩔 수 없이 따라온 엄마, 아빠에게 연신 질문을 해대는 꼬마들은 답을 채 듣기도 전에 다음 칸으로 이동 중이다. 특히 공룡 뼈는 세대가 바뀌어도 식을 줄 모르는 인기를 구가한다. 사후에 이렇게 인정받을 줄을 꿈에나 알았을까, 공룡 녀석들이. 그런데 반나절 실컷 재미있게 놀다 가는 이 모습은, 한평생 일관되게 동물을 테마로 살아온 나에겐 가장 신기한 현상 중 하나이다. 애들이 공룡 따위에 열광하는 사실 자체가 이상한 것은 물론 아니다. 부모가 자식이 커서 되길 바라는 상과 무관하게, 어..
텔레비전을 켜면 화면 오른쪽 상단에 숫자가 떠 있는 걸 볼 수 있다. 프로그램에 담긴 선정성, 폭력성, 잔인성에 따라 시청이 가능한 최소 나이를 나타내주는 숫자다. 남세스러운 장면 잘못 봤다가 우리 애 이상한 짓 할라. 때려 부수는 거 자주 봤다가 우리 아이 성격 나빠질라. 자라나는 이 땅의 꿈나무들에게 가능한 한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고자 하는 어른들의 마음이 담긴 정책으로, 그 효과에 대해선 회의적이더라도 그 취지에는 대부분 공감한다. 좋은 걸 보고 자라야 좋은 사람 되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자식만큼은 더 나은 삶으로 끌어올리려는 전 국민적 교육열이, 이 나라를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힘이라 해도 아마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바마도 툭하면 한국의 교육정신을 들먹이는 걸 보면 세계적으로도 우리가 유난스..
인생은 선택이다. 지금 이 순간 앉아서 이 글을 쓰는 대신, 마음먹기에 따라 나는 책상 위로 올라가 플라멩코 춤을 출 수도 있고, 느닷없이 춘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을 수도 있다. 순간마다 무한대로 열려 있는 삶의 옵션들 중에서 어떤 한 가지를 선택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보다시피, 춤과 여행을 잠시 접어두고 글쓰기를 하기로 결정한 데에 야생학교와의 약속이라고 하는 수긍할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멀쩡한 옵션들 다 제치고,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선택을 할 경우에는 대체 왜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이때 우리가 사용하는 핵심어는 ‘굳이’이다. 질문은 다음과 같은 형태를 띤다. “왜 ‘굳이’ x를 해야만 하는가?” 빈 공간 다 놔두고 통로를 막고 잡담을 ..
여름의 끝자락을 적시는 가을비가 임박한 계절의 변화를 알린다. 가을이 서늘한 공기와 우수의 기운을 대동하고 머무는 것도 잠시, 좀 즐길라치면 금세 추워져 한겨울 속에 폭 빠져 있을 것이다. 주섬주섬 옷장에 넣어두었던 스웨터와 외투를 꺼내본다. 묵혀둔 나프탈렌 냄새가 가시고 나면 두툼한 섬유의 보드라운 촉감에서 추운 날씨의 정취가 느껴진다. 시원하고 강렬한 색으로 꾸몄던 여름 맵시도 좋았지만, 따뜻하고 그윽한 분위기의 가을·겨울 패션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과일처럼, 제철의 미가 있는 법이다. 문제는 바람이다. 기후변화의 탓인지, 언제부터인가 바람이 부쩍 세져서 외출 준비를 할 때 반드시 감안해야 하는 요소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머리를 잘 만지고 나와도 바람의 거친 손길에 헝클어져 엉망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