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13일 세계는 두 사람의 위대한 작가를 잃었다. 한 사람은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 다른 한 사람은 우루과이의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이들은 오랫동안 정열적으로 세계의 양심을 대변해온 이른바 ‘좌파 문학의 거장’으로서 세계 전역의 독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왔는데, 신기하게도 같은 날 타계했다. 그런데 한국의 언론에서는 귄터 그라스의 사망소식은 꽤 자세히 보도됐으나, 갈레아노의 소식은 (극소수 예외를 제외하고) 깜깜이었다. 이게 의도적인 결과인지, 혹은 무지나 무관심의 소치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내 편견인지 모르지만, 굳이 말하자면, ‘나치스’의 망령과 평생 싸웠던 그라스도 물론 중요하지만, 훨씬 우리의 주목을 끌어 마땅한 작가는 갈레아노이다. 왜냐하면 그는 오늘날 글로벌 자본의 압도적 지배 밑에서..
1년이 다 됐는데도 이 꼴이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구성된 진상조사특위는 출범조차 하지 못하고 있고, 아직도 건져내지 못한 시신들은 기약 없이 바다 밑에 갇혀 있다. 이 판국에 정부가 입안한 ‘시행령’은 진상조사특위의 권한과 조사 범위를 제한하여 “정부조사 결과의 분석 및 조사”에 국한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시행령’대로 한다면 특위에서 행정지원이나 맡아야 마땅할 공무원들이 실제 조사업무를 관장케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조사를 받아야 할 대상이 오히려 조사의 주체가 된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는 또 한번 독립적이고 엄정한 진상규명을 어떻게든 좌절시키려는 정부의 ‘의지’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이 말도 안 되는 ‘시행령’은 당연히 철회되어야 한다. 억울하게 자식을 잃고, 가족을 잃은 유족들..
2011년 3월11일, 미증유의 지진과 쓰나미로 일본 동북부가 초토화되고, 헤아릴 수 없는 사상자·이재민이 생겨난 게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4년이 지나갔다. 그러나 지진과 쓰나미에 의한 재해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는 세월이 가면 어떤 식으로든 수습이 되고 아물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날 동시에 일어난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이다. 4년이 경과했지만, 사고를 온전히 수습할 수 있는 대책은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아마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이 방사능은 기약 없이 방출되고, 대기와 해양은 끝없이 오염되고 있다.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미국과 캐나다의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미 북미지역도 후쿠시마 사고의 심각한 피해지역이 되었다. 북미지역의 유아사망률이 현저히 높아졌다는 통계는..
젊은 세대에게는 생소한 이름일지도 모르겠지만, 민병산 선생(1928~1990)은 한때 이 나라의 상당수 양심적인 지식인·예술가들의 친근한 벗이자 스승으로서 깊은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살다가 가신 분이다. 그분은 아무런 재산도, 일정한 직장도 없이, 일생을 독신으로 지낸 무욕의 현자이자 박람강기(博覽强記)의 독서인이었다. 그분은 번역이나 좋아하는 바둑의 해설을 쓰거나 수필을 써서 생계를 영위했고, 생애 말년에는 고서화와 지필묵의 거리(인사동)를 거닐며 자신이 쓴 붓글씨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다가 가셨다. 한마디로 자유인이었다. ‘자유인’으로서의 그분의 면모는, 생활에서든 말과 글에서든 자신의 에고를 내세우거나 공격적인 자기주장을 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그래서 그분과 가까..
한달 전 이 난에서 나는 ‘깊은 민주주의가 세상을 살린다’라는 제목 밑에서 ‘깊은 민주주의’의 실천적 모범사례로 덴마크의 ‘시민합의회의’라는 제도를 소개했다. 내가 ‘깊은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당연지사로 여기는 ‘선거에 의한 대표자 선출’이라는 제도가 기실은 선거를 통해서 기득권 세력의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우리가 정말로 좋은 삶을 누리려면 일반시민이 명실상부한 정치의 주체가 되는 대안적인(혹은 새로운) 시스템을 긴급히 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깊은 민주주의’는 지금 세계 도처에서 갈수록 위축돼 가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소생시킬지 고민하고 모색하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 쓰는 용어이다. 이 용어가 널리 쓰이는 것은 말..
세상 돌아가는 꼴이 말이 아니다. 세월호 사태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생명보다 돈을 중히 여기는 풍조는 조금도 변화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온갖 불의와 부조리, 비이성과 몰상식이 활개를 치는 사회는 갈수록 자정기능을 잃고, 병들어 썩어가고 있다. 이 상황에서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 모든 사회적 부패와 병리현상에 대하여 최종적인 책임이 있는 ‘정치’가 지금 완전히 기능 부전 상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전체 근로소득자의 절반 이상이 기아임금을 받고, 자살률은 산업국가 중 최고인데다 젊은이들은 결혼도, 가정을 꾸리는 일도, 아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게 지금 이 나라 ‘국민’의 생활실태이다. 그런데도 이런 문제는 이 나라 통치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점점 심해지는 실..
후쿠시마 사태 이후, 많은 일본 시민들은 ‘핵 없는 세상’을 절규하며, 정부에 원자력 정책의 변경을 요구하는 크고 작은 시위를 계속해왔다. 그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의 발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의 하나는 노벨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말이었다. 그는 엄청난 원자력 재해를 겪고도 기존 원자력 정책을 완고하게 밀고 가려는 정부와 지배층의 태도에 절망하고, 그것을 “우리는 모욕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로 표현했다. 나는 오에 겐자부로를 별로 중요한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반핵 시위에 적극 참여할 뿐만 아니라 시위대 앞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는 사실 하나로 그를 다시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발언은 오늘날 일본을 비롯해서 한국, 나아가 세계의 지식인, 작가, 예술가들이 느끼는..
“인민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심각한 착각이다. 그들은 선거기간 동안만 자유로울 뿐이다. 선거가 끝나면 그들은 다시 노예가 된다.” 이것은 250년 전에 루소가 했던 유명한 말이다. 지금 우리들에게 이 오래된 루소의 명언보다 더 실감나는 말이 있을까? 선거기간 중 ‘경제민주화’를 실현하겠다, ‘100% 국민대통합’을 지향하겠다, ‘국민행복시대’를 열어가겠다 등등, 매우 듣기 좋은 말들을 되뇌며 몸을 낮춰 다가올 때, 많은 유권자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 이 모든 약속들이 죄다 헛소리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것들은 ‘원칙과 신뢰’의 인간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후보가 제시하는 약속이 아닌가? 선거용일 것이라는 의심이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완전히 거짓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