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그대가 경성에 쳐들어간 뒤 누구를 추대할 생각이었는가? 답: 일본군사를 물리치고 간악한 관리들을 몰아내어 임금 곁을 깨끗이 한 뒤 주춧돌처럼 믿음직한 몇 사람의 선비를 내세워 정치를 하게 하고, (나는) 시골로 돌아가 평상의 직업인 농사에 종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국사를 한 사람의 세력가에게 맡기는 것은 큰 폐해가 있었음을 알기에 몇 사람의 명사들이 협의하고 화합하는 합의법에 따라 정치를 담당하게 할 생각이었다. 이것은 동학농민전쟁을 이끌었던 ‘녹두장군’ 전봉준 선생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진행된 심문 과정에서 일본영사와 나눈 문답내용이다. 이 내용은 1895년 3월6일자 ‘도쿄아사히신문’에 ‘동학수령과 합의정치’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전봉준 장군의 이 ‘합의정치’..
며칠 동안 프란치스코 교황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가톨릭교회의 최고 지도자라는 극히 존귀한 신분이면서도 교황은 한결같이 겸허한 자세를 취했고, 약하고 소외받고 버림받은 존재에 대한 끝없는 동정과 관심을 나타냈다. 무엇보다도 그는 단순·소박한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 것인가, 사람다운 사람, 혹은 지도자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을 무언중에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떠났다. 이런 모습은 지도자다운 지도자의 부재로 늘 시련과 고통을 받고 있는 이 나라 민초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그러한 자세와 언행은 그가 세속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종교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온갖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히고설킨 정치현..
“깨끗한 에메랄드빛 물이 장미와 인동덩굴들로 둘러싸인 바위들에 부드럽게 부딪히며 찰싹거리거나 자갈들이 깔린 강변과 흰 모래톱 위로 굽이치며 흘러가고 있다.” 이것은 영국왕립지리학회 회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1898년에 쓴 속에서 묘사한 남한강 상류의 모습이다. 이 아름다운 세계는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남한강뿐만 아니라 한국의 거의 모든 큰 강들은 곳곳에서 댐과 콘크리트 시설물들에 의해 끊임없이 가로막히면서 강다운 모습을 계속 상실해왔다. 여기에 결정타를 입힌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명박 정부가 강행한 소위 ‘4대강 사업’이다. 강을 정비한다며 모래톱과 강바닥을 분별없이 파헤치고, 옥답 중의 옥답인 강변 둔치들을 가차없이 제거하고, 대규모 댐들로 곳곳에서 강의 흐름을 막아버리면, 강이 완전히 파괴된..
세월호 참사 직후 나는, 이 나라의 집권세력에 대하여 어느 지면을 빌려 다음과 같이 썼다. “(그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통절히 자각하고, 개과천선할 가능성은 있는가? 단 1퍼센트도 없다. 많은 아이들이 물에 잠겨 있는 동안은 잠시 엎드려 있겠지만, 곧 그들은 다시 그들의 오래된 습성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들의 뿌리 깊은 무지와 교만, 무교양과 무례함이 빚어내는 거짓과 위선의 정치에 치를 떨며 한없는 무력감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2014·5·7) 불행하게도 내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지방선거 기간 동안 “반성합니다, 사과합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며 90도로 허리를 꺾어 간절히 빌던 사람들이 선거가 끝나자마자 표변해버렸다. 내 예상은 맞았지만, 완전히 맞지는 않았다. 솔직..
새해 첫날, 경향신문 신년기획 ‘문명, 그 길을 묻다’의 첫회 대담을 흥미롭게 읽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등 몇 권의 중요한 책으로 한국 사회에서도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왜 하필 이 시리즈의 선두에 내세워졌는지 궁금하다. 아마 신문 편집자도 지금 이 문제를 가장 절박한 문제로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이 문제라는 것은 물론 문명의 지속가능성 여부다. 아니, 이 지상에서 인간 생존의 지속가능성 자체의 문제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다이아몬드 교수의 이야기 중 가장 심란한 대목은,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고 할 때 현재의 어린 세대나 장차 태어날 아이들이 2050년쯤 맞이할 세상이 어떤 세상일지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자기가 생물학자에서 생태주의자로 변신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도 자신의..
전주에서 가톨릭 사제들이 공개적으로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하고, 그 자리에서 박창신 신부의 강론이 있었던 것은 지난 11월22일이었다. 그 강론에서 이 원로 신부는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를 갈수록 유린하고 있는 정권에 대해 매서운 비판을 했다. 그러자 수구세력과 정부는 거두절미하고 이 발언 중에 나온 한마디 말을 꼬투리 잡아 과장되게 왜곡해 이적성 발언이라고 규탄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종북 척결’이라는 상투적인 공격 논리를 꺼내들면서 말이다. 이 와중에 대통령까지 나서 “묵과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자 검찰이 수사에 들어간다는 뉴스도 나왔다. 그중에서도 특기할 것은 ‘대한민국수호천주교모임’이라는 단체가 보여준 반응이다. 그들은 성직자가 정치에 개입했다고 하여 박창신 신부를 파문해 줄 것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남아프리카의 가톨릭 신부이자 학자인 앨버트 놀란이 쓴 라는 매우 흥미로운 책이 있다. 이 책의 주안점은 기독교 성립 이전의 상황, 즉 로마제국의 변방 식민지였던 팔레스티나에 살던 한 인간을 “진지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동시대인의 눈을 통해서” 묘사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독자들이 보는 것은 메시아, 구원자, 삼위일체의 신(神) 등등 기독교 신앙이 전제된 예수상이 아니라 가난한 식민지 땅에서 이웃들과 나날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하면서 살았던 ‘목수의 아들’의 실존적 삶과 그 내면이다. 앨버트 놀란의 문제의식은, 태생으로 보나 교육으로 보나 중류계급 출신이며 삶의 조건이 별로 불리하지 않았던 예수가 “하층민 중에서도 최하층 사람들과 어울려 사귀고 또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 세상에 미래가 있을까? 우리에게 정말 희망이 있는가? 연일 ‘내란음모’니 뭐니 하며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뉴스쇼’들을 보고 있자니 괴롭다기보다 한심하다는 생각만 든다. 하기는 현역 국회의원이 ‘내란음모’에 연루되었다니 재판 결과가 어떻게 되든 혐의 사실만으로도 충격적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 혐의를 뒷받침하고, 인신 구속의 근거로 제시된 증거물, 즉 소위 ‘녹취록’을 읽어보면 이게 코미디도 아니고 대체 뭔가 하는 허망한 생각이 절로 든다. 장난감 총을 개조해서 뭘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통신시설과 유류탱크를 어떻게 공격해서 뭘 하자는 것인지, 혹시 이 방면의 전문가들은 짐작하는 게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처럼 어리석은 백성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잡히는 게 없다. 당사자들한테는 실례 되는 말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