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대 초반의 그녀는 지난봄 회사에서 중요한 직책으로 승진했다. 열심히 일해서 얻은 정당한 성취였고 원했던 일이기에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최초의 기쁨이 지나가자 막다른 벽에 부딪친 듯한 마음 상태가 되었다. 다행히 그녀는 자기 성찰 능력이 있었기에 자기가 느끼는 막막한 감정이 일종의 불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점은 그 불안의 근거가 없으며, 평소처럼 조절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나름대로 여러 가지 노력을 해본 듯했다. 그러다가 일면식도 없는 내게 메일을 보내왔다. 그녀처럼 승진 후 혼돈에 빠지는 여성을 더러 만난 일이 있다. 그녀들은 대체로 업무를 스마트하게 해내고, 조직 생활에 잘 적응해온 성격 좋은 이들이다. 상사나 사용자 입장에서 볼 때 믿음직한 부하 직원이었기에 그 자리..
요즈음 도심 거리를 걷다보면 곳곳에서 외국인 관광객들과 맞닥뜨린다. 고궁이나 쇼핑몰은 물론 전통사찰 같은 곳을 방문하는 이들도 많다. 사찰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더러 법당에 들어가 예를 올리기도 하고, 마당에 서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법당 밖 계단에 걸터앉아 쉬기도 한다. 산책길에 나도 가끔 그들처럼 계단에 걸터앉아 쉬는 일이 있다. 얼마 전, 관광객들 옆에 앉아 더위를 피하는데 바쁘게 법당으로 향하던 초로의 여성이 갑자기 우리 쪽으로 다가오더니 외국인 관광객을 향해 높고 빠른 톤으로 한국말을 쏟아냈다. “아이고, 절에 오면서 이렇게 다 벗은 꼴로 오다니, 이거 가려야 돼, 이거.” 돌아보니 그녀는 벌써 외국인 여성의 어깨에 걸쳐진 스카프 자락을 들어 그것으로 그녀의 가슴께를 덮는 시늉을 반복하고 있었..
젊은이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가끔 친구 문제에 대해 질문받는다. 가학적인 친구 관계를 끊지 못하는 경우, 이기적인 친구 때문에 늘 소극적인 분노 상태에 있는 젊은이들을 본다. 그러면 우선 이렇게 대답한다. “서른 살에도 친구 문제로 고민한다는 것은 시기 착오적이다.” 그런 다음 사마천의 계명우기(鷄鳴偶記) 편에 나오는 네 종류의 친구 이야기를 해준다. 적우, 일우, 밀우, 외우. 적우(賊友)는 도적 같은 친구이다. 자기 이익을 위해 친구를 사귀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친구는 상대가 더 이상 나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관계가 소원해진다. 일우(닐友)는 즐거운 일, 어울려 노는 일을 함께하는 친구이다. 적우나 일우는 친구의 어려움을 떠안을 마음이 없고, 나쁜 일이 생기면 상대방을 탓하기 십상이..
지난 12일부터 사흘 동안 한국상담학회의 연차 학술대회가 있었다. 대학 건물 한 동을 통째로 빌려 여러 강의실에서 세미나, 심포지엄, 워크숍 등이 개최되었다. 주최 측에 의하면 3500명이 등록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독자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이런 질문을 받았다. “뉴스를 보기 두렵다. 우리 사회가 대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이것은 10여년 전부터 독자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꾸준히 받아온 질문이기도 하다. “치유를 이야기하지만 우리 사회가 현상적으로는 더 위험하고 혼란스러워 보이지 않느냐?” 그럴 때마다 나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지금의 이 혼돈은 건강한 사회로 가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불안해할 게 아니라 의미를 이해하면 되고, 낙담할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
우리가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말 중에 “정말?”이라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상대의 말을 의심하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의 말에 감탄하거나 동의할 때 사용하는 것이 관례이다. 적어도 나의 용법은 그랬다. 어느날 빵집에서, 빵집 여주인이 자기네는 국산 유기농 밀가루만을 사용한다는 말을 듣고 “정말요?” 하고 대응한 적이 있다. 그때 내 마음은 반가움이었다. 밀가루 음식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신체 탓에 국산 유기농 밀가루로 만든 빵이라면 신체가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 나온 감탄사였다. 그런데 빵집 주인의 반응이 의외였다. “그럼 사실이지, 내가 거짓말하겠어요?” 문득 톤이 높아진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명백히 분노가 쏟아져 나왔다. 느닷없이 받아 안게 된 분노에 많이 당황했고, 내가 사용한 “정말..
“내 아기는 특별하다”는 한때 텔레비전 광고에서 자주 들었던 카피이다. 그것은 또한 세상의 모든 아기 엄마들이 입 밖에 내지 않아도 확실하게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감정이다. 엄마들은 누구나 “내 아기가 천재가 아닐까” 뜨겁게 고민하는 시기를 보낸다. 엄마의 눈에는 아기의 모든 것이 특별해 보인다. 아기의 특별함이 아니라 엄마가 자신을 특별하다고 여기는 나르시시즘이 아기에게 투사된 감정이라는 사실은 잘 인식되지 않는다. 아기가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된 후에도 아기에게 투사된 엄마의 나르시시즘은 포기되지 않는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자녀를 특별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한 노력을 경주한다. 다양한 조기 교육을 하고, 수많은 학원을 돌게 하고, 조기 유학을 보내기도 한다. 특별한 재능이 보인다 싶으면 그 분..
새천년이 시작되는 첫해에 나는 뉴질랜드를 여행 중이었다. 오클랜드의 큰 서점에 들어가 베스트셀러 1위 코너에서 집어든 책은 세라 도너티의 라는 소설이었다. 1998년 캐나다에서 처음 출간된 이후 두 해 이상 영어권에서 두루 읽히는 중인 듯했다. 소설은 한 가족의 일상을 묘사하는 밝은 분위기로 시작된다. 대학에 진학하여 큰 도시로 유학을 떠나는 딸의 짐 싸기를 돕는 부부 모습이 한동안 묘사된다. 부부는 딸이 대학 생활에서 누릴 즐거운 활동들에 대해 조언한다. 딸을 배웅한 후 자동차가 막 공항 주차장을 빠져나오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남편이 운전 중인 아내에게 차를 잠깐 세우라고 청한다. “우리 이혼합시다.” 남편은 딸이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기다려왔다고 말한다. 짐을 꾸려놓으면 사람을 시켜 가져가겠다고 덧붙..
직장 생활을 하는 후배 여성들이 가끔 조직에서 처신하는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업무보다 힘든 것이 사람 관계라고 말한다. 업무는 혼자서만 열심히 하면 되는데 인간관계는 이쪽에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저쪽에 독자적이고 유기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타인이 있기에 어렵다고 한다. 그런 이들 중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부장님이 나를 미워하는 것 같다”고 느끼는 이도 있다. 그런 말을 하는 여성은 대체로 온순하고 조용한 말투를 사용하며, 선량한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런 이들에게 웃으면서 말해준다. “부장님은 자기를 미워할 여유가 없어요.” 그러면 후배 여성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중간 관리자쯤 되는 자리에 있는 이들은 회사 업무에 책임이 무거워지고, 집에서 가장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