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노멀’이라는 말이 회자된 지 오래다. 원래는 저성장, 저금리, 저물가 상황을 뜻하는 경제 용어였다. 이제 뉴노멀은 팬데믹 위기가 만드는 변화를 칭하는 말로 확장됐다. 위기라는 낱말에는 위협과 기회라는 두 가지 뜻이 숨어 있다. 위기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통해 국가와 사회의 역량을 파악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 해결의 주체는 명확한가, 얼마나 기민하게 문제를 진단하고 대응하는가, 얼마나 인력과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가. 코로나19 대응은 한국이 갖고 있는 역량의 강점과 약점 모두를 보여주는 거울 같다. 정부는 질병관리청과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한 컨트롤타워를 구축하고, 사스와 메르스 대응에서 빛을 발한 광범위한 검사→추적→치료 및 격리라는 3T 메커니즘을 수행하자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 사는 조슈아 후타가룽(33)의 양철 지붕을 뚫고 운석이 들어와 마당에 박혔다. 관 짜는 일을 하던 조슈아는, 맑은 날이었는데 하늘에서 뭔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집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흔들렸다며 운석을 파내보니 여전히 따뜻했다고 말했다.(2020·11·20 연합뉴스)” 산에 가지 못하고 주말에도 방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날의 연속이다. 최근에 접한 운석에 관한 저런 웅장한 뉴스를 떠올리며, 어릴 적 별똥별의 그 낙하하는 곡선에 소원을 얹어두었던 기억과 함께 안산 자락 아래 서대문자연사박물관으로 간다. 눈이 돌아갈 만큼 휘황한 전시품들 사이 한구석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 운석은 혜성에서 떨어져 나온 고체 파편이 대기에서 살아남아 지구 표면까지 도착한 물질의 총칭이다. 생명..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 촛불혁명을 거친 민주주의 시대에 ‘독재’ ‘반민주’라는 단어가 거침없이 쓰이고 있다. 마치 독재시대로 회귀해 사는 것은 아닌가 착각할 정도다. 정권 비판에 단골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야당 국회의원이나 보수 논객은 그렇다 치고 반정부 투사 이미지로 단숨에 대선후보 반열에 오른 검찰총장의 언사에도 등장하고 있다. “친문독재” “민주주의는 죽었다” “독재정당”이라고 적힌 손팻말이 국회의사당 한쪽을 가득 메웠다. 야당의 백드롭(배경 현수막)도 예외는 아니다. 집권 여당이 공수처법 개정안에 이어 공정경제 3법을 밀어붙이자 국민의힘은 ‘거대 여당의 입법독재, 국정농단이 일상화’되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독재로 흥한 자 독재로 망한다’라고도 비판했다. 이에 발끈한 민주당 법사위원..
“ ‘공수처는 누가 견제하느냐?’는 멍청한 질문을 보수야당, 언론, 논객이 유포한다. 공수처에 대한 비리는 당연히 검찰이 수사한다. 검찰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공수처를 감시할 것이다. 물론 공수처는 눈을 부릅뜨고 검찰을 들여다볼 것이다. 공수처 발족 후 공수처와 검찰 간의 긴장, 팽팽할 것이다.” 조국 전 장관이 SNS에 올린 글이다. 어이가 없다. 검찰이 가졌다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그대로 공수처로 옮겨놓고 기껏 하는 얘기가 ‘공수처의 비리는 검찰에서 수사’할 테니 괜찮단다. ‘권한’의 문제를 슬쩍 ‘비리’의 문제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수사하던 이인규에게 어떤 비리가 있었으며, 조국 전 장관을 수사하던 검사들에게는 무슨 비리가 있었던가? ‘가장 지독한 나치는 성실한 나치’라는 말이 있..

한글은 자음과 모음이 궁합을 맞춰 문장 안에 감쪽같이 섞인다. 우리글은 끝까지 다 읽어야 그 방향을 알려준다. 배의 키처럼 서술어가 뒤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한문은 한 글자마다 각자 독립한다. 더듬더듬 뒤늦게 한문을 익히며 드는 생각. 한문에서 부정과 금지를 나타내는 건 非(비), 不(부), 弗(불), 無(무), 未(미), 莫(막), 毋(무), 勿(물) 등이다. 이들은 초성의 음가가 모두 미음이거나 비읍이다. 왜 이들은 ‘몸’이나 ‘밥’처럼 묵직하게 문장의 처음에 도사리고 앉아 있는 것일까. 또한 한문에서는 부정문이 왜 이리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일까. 부정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아니 不’에 대해 생각해 본다. 不은 꽃잎을 잃고 꽃받침만 남은 것을 형상화한 글자라고 한다. 간단해서 더 어려운가. 공책에..
이 겨울에 들어서면서 우리가 이렇게 말이 없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나라가 조용하다는 건 아니다. 사실은 아주 소란스럽다. 상대 정파의 지지율을 1%라도 낮추기 위해 혹은 자기 콘텐츠의 구독자 수를 한 명이라도 늘리기 위해, 소리를 지르고 글을 써대고 영상을 제작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두가 ‘좋아요’와 ‘싫어요’를 원하는 한가한 말들뿐이다. 내가 행방을 찾고 있는 것은 생존 위기에 처한 ‘우리들’의 말이다. 도대체 이 겨울을 어떻게 날 것인지. 아니, 그 전에 어떻게들 살고 있는지. 한탄이라도 함께 했으면 좋겠는데 말을 나눌 사람도, 기회도 없다. 이 겨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론 당국으로부터 지침은 받고 있다. 매일 신규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를 통보받고, 거리 두기 단계가 어떻게 ..

배추전을 하겠다며 주방에서 꼼지락꼼지락하던 딸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잎사귀 뒤에서 빵긋 달팽이를 만난 것이다. 곤충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닐 정도는 아니었으나 말똥구리, 풍뎅이, 사마귀는 그리 낯설지 않은 내 어릴 적 소꿉친구들. 벌레만 보면 기함을 하는 아이를 타박하는 건 경우가 아니겠다. 자연과 접촉할 기회를 박탈한 채 아파트를 고향으로 만든 제 용렬한 아비를 탓하는 게 옳다. 아이는 달팽이의 성정을 이윽고 파악했는지 금방 친해진 눈치다. 어쩜 똥도 행위예술하듯 일획으로 시원스레 갈기느냐고 시시덕거린다. 가끔 접시 위에 얹어놓고 산책시키는 중이라며 잘 데리고 논다. 모두 배추로 연결이 되는구나. 소설 지나고 이곳저곳에서 김장 소식 들린다. 겉절이는 물론 막 담근 김치에 돼지고기 수육이 주르륵 배열된다...
지구 양쪽의 극지처럼, 우리는 반대편에서 서로를 본다. 함께 살 수 없는 북극곰과 남극펭귄처럼, 우리는 다른 세상을 산다. 모두 알다시피 이를 ‘이념적 양극화 현상’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말문을 열면 고고한 양비론을 펼치려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아니다. 불가피하게 양극화될 수밖에 없는 사안들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더 분명한 것은 그렇지 않은 사안들이 더 많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 둘이 구별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법안과 정책은 언제나 찬반 승부의 대상이 되고 뉴스엔 딱 두 종류의 댓글만 달린다. 2000년대 이후 급격해진 이 현상에 대해선 전문가들의 연구가 많지만, 전문가가 아닌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북극곰과 펭귄이 서로 몰라도 될 것들을 모르는 채로 살았더라면 서로 이렇게까지 미워하게 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