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이 있다. 일이 작을 때 처리하지 않다가 막바지에 이르러서 큰 힘을 들여야 해결됨을 이르는 말이다. 뒤늦게 가래로라도 막을 수만 있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지금은 가래로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논란과 파장이 걷잡을 수 없다. 미적대다가 때를 놓치고 사태를 수습하려다 거짓말까지 들통나 정의와 신뢰의 상징이어야 할 사법부 수장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법원 내부의 불만도 만만찮다. 대법원장 사퇴하라는 야권의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거짓 해명보다 미온적인 태도가 더 문제다. 사직을 받아주지 않으려면 확실하게 탄핵감이라고 말했어야 하는데, 탄핵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며 바깥에서 탄핵하자고 설치고 있으니 가만히 있으라는 소극적 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시민사회와 국회..
느긋한 휴일 아침, 눈이 몹시 내렸다. 이 기세라면 알록달록한 문명을 제로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았다. 이대로 사흘만 쏟아져도 서울은 아득한 태곳적 서라벌로 변하고 남산은 그야말로 우뚝 돌발한 눈탑. 하지만 아무리 과장법을 동원하려고 해도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어쩌면 올해의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눈의 여운을 찾아 남산터널 지나 인사동으로 나섰다. 아직 토막난 골목이 군데군데 숨어 있는 곳. 발자국을 몇 개 찍으며 늘샘 김영택 화백의 전시회를 보았다. 그야말로 수십만 획의 섬세한 선들이 지배(紙背)를 뚫을 듯 은모래처럼 반짝거리는 펜화. 안타깝게도 작가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유고전이 되고 말았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소란스러운 인사동을 빠져나와 걸음을 옮긴다. 북망산으로 가는 듯 종로 지나..
2021학년도 대학입학 정시모집 합격자 발표와 등록이 한창이다. 지방대의 위기가 담론이 아닌 현실이 됐다. 서울에 입지한 명문대들과 몇 개의 과학기술원을 제외하면 지방 사립대는 물론 지방 거점 대학도 전체 경쟁률 3 대 1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수험생들이 정시에서 지원하는 학교가 가, 나, 다군 3군데라는 것을 감안하면 경쟁률 3 대 1이 되지 않으면 어떤 지원 단위든 미달될 가능성이 있다. 입시 게임의 배치표에서 가장 아랫단에 위치한 지방 사립대들은 장학금 지급으로 열세를 만회해 보려는 중이다. 어떤 대학교는 일시금 100만원, 다른 대학교는 몇 학기 등록금 면제. 어느 재단이 더 재정 여력과 의지가 있는지를 정시 합격 신입생 장학금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적어도 10년 전부터 교육현장,..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서 골목이 없어졌다. 골목이란 호기심의 창고. 그것을 먹고 자라던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처마가 사라졌다. 처마란 하늘을 맞이하는 응접실. 그 아래에서 잠시 비를 긋던 사람들도 이젠 없다. 물론 빗소리도 함께. 지난주 밤늦게 본 다큐. ‘마지막 화전민, 사무곡의 겨울’의 한 장면이 길게 여운을 남겼다. 산에서 태어나 군대생활을 제외하고 팔십이 넘도록 산중 굴피집에서 살아가는 노인. 산이 터전인 노인의 몸에는 산이 그대로 들어앉은 듯하다. 굽은 어깨는 산의 능선을 빼닮았다. 밭 가운데 선친의 묘에 제사 지내고 혼자 앉아 음복할 때 뒷모습. 고단한 등이 두툼하게 솟았다. 휜 등에 작은 무덤이라도 숨기고 있으신가. 굴참나무 껍질을 기왓장처럼 지붕에 얹은 굴피집에서 ..
이 지면에 칼럼을 게재한 지 꼭 4년이 되었다. 2017년 1월, 대통령 탄핵으로 주말마다 수백만의 인파가 광화문에 집결하던 때였다. 다른 때였으면 원고 청탁을 거절했을 것이다. 때에 맞게, 좋은 글을, 규칙적으로 쓴다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날 청탁을 수락했던 것은 목소리를 보태기 위해서였다.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던 함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함성 때문에 더욱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있었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자 기준, 그리고 장애인수용시설의 폐지를 요구하며 5년째 광화문 지하를 지키던 사람들.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서 결심했다. 이 지하 농성장의 볼륨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다면 싸구려 앰프라도 되어야겠다고. 그해 가을, 농성은 마무리되었다. 정부가 이들의 요구를 ..
펄, 펄, 펄, 내리는 눈송이를 보면서 맴, 맴, 맴, 우는 매미 소리를 떠올리는 버릇을 지닌 지가 여러 해다. 매미와 눈. 내리는 방향과 착지하는 자세가 너무 닮았다. 둘이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결정적 근거를 들이댈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증거 또한 어디에도 없다. 같은 자리에서 피고 맺는 꽃과 열매도 서로 만나지는 못한다. 이 겨울의 가운데에서 땡볕의 매미 소리를 소환하는 것으로 냉기는 한결 가시고, 괜히 주눅 든 나의 어깨도 슬쩍 기지개를 켜며 냉랭한 마음 한 조각도 잠시 데울 수 있지 않은가. 아주 오래전 서른의 깔딱고개를 넘을 무렵이다. 고민은 쌓이고 미래는 막힌 굴뚝 같아서 응급처치라도 아니하면 하루도 건사하기 힘들어 해묵은 다이어리에 빽빽하게 글씨를 쓰던 날이 있었다. ..
한국어 문화의 가장 큰 약점은 호칭일 것이다. 관계 형성에 악영향을 끼치는 지독한 결점이다. 몇몇 기업에서는 수평적 소통을 위해 이름이나 별명 뒤에 ‘님’을 붙여 부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가족과 친구가 아니라면 이름을 부르기보다는 상호 지위 관계를 표시하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낯선 사람과 소통을 시작할 때는 이름을 모를뿐더러 서로 높낮이를 정하기도 어려우니 호칭을 택하기 더 어렵다. 집배원, 택배노동자, 경비원, 환경미화원, 요양보호사, 종업원 등은 호칭이 아니라 명칭이다. 여기에 ‘님’을 붙여 부르는 것은 번거롭기도 하고 어색하게도 느껴진다. 아저씨, 아줌마, 이모, 저기요, 라고 부르면 미안해지지만, 높여 불러보자니 마땅한 말도 없는 데다 과공비례(過恭非禮)가 될까 주저된다. 같은 한국..
나무가 처음부터 제자리에 머문 건 아니었으니 짐승에 쫓겨 달아나기도 하고, 고사리의 간지러움을 피해 바위 근처로 물러났다가 절벽 위에 멈추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멀리 뻗어 나가던 뿌리가 제 허리를 뒤에서 부여잡는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 아, 나 있는 곳이 둥근 바닥이로구나. 메아리가 귀로 돌아오는 것처럼, 언젠가는 제 본래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삐거덕삐거덕 노 젓듯 팔 흔들며 돛단배처럼 돌아다닌다. 외출도 하고, 섬에도 건너가고, 어쩌다 외국에도 가보았으나 손오공이 부처님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듯 저 나무들의 둘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나도 결국 원점 회귀하듯 귀가해야 하는바, 이 또한 세상이 둥글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리라. 저 멀리 바다에서 깃발부터 차츰차츰 보이기 시작하는 통통배, 활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