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정반대의 결과로 끝났지만, 미국 대통령 선거 당일 트럼프가 승리해 재선에 성공할 것으로 예상되던 때가 있었다. 다른 나라 선거인데도 정치인으로서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상당한 실망과 심리적 충격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대가 그런 것인가’ 하는 좌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처음 트럼프가 당선된 것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엘리트주의와 특권의식에 젖은 기성 정치인들에 대한 반발, 계층 간 이동이 극심하게 어려워지면서 희망을 잃은 사람들의 불안이 포퓰리스트를 통해 표출된 것이 하나의 원인이라고 진단할 수 있다. 이해관계의 조정과 사회통합이라는 제 역할을 못해 회초리를 맞은 그때까지의 정치를 재정비하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지막지한 편 가르기와 ..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은 아주 오래전에 들었다. 정말 길이 책 속에 있을까? 책과 함께, 책과 더불어, 책을 통해. 이 어려운 시기를 빠져나가는 구체적인 방법이 이 말속에 다 들어 있다. 해리 포터가 런던 킹스크로스 역의 9번과 10번 사이의 벽으로 난 길을 통해 호그와트로 들어가듯! 바깥 외출이 여의치 않아 산에 가지 못하고 옛날에 산에 갔던 기억이나 불러내어 되새김질하는 토요일 오후. 방구석에서 스킨답서스가 책으로 가득한 벽을 넌출넌출 기어오른다. 식물과 책, 책장과 유리창. 그중에서 줄기와 잎사귀를 쪽배처럼 타고 강원도의 산으로 빠져나가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곳은 삼척의 덕항산. 기암절벽으로 관광객을 끌어모은다는 중국의 이런저런 산들에 견주어 그 경치와 형세가 하나 꿇리지 않는 산이다. 환선..
신입생 입학률, 재학생 충원율, 졸업생 취업률. 교육부가 대학에 요구하는 핵심 지표들이고 수도권에서 멀어질수록, 국립대보다는 사립대가 더 챙기는 지표다. 입학 최종 합격자 중 몇 명이 등록했는지가 입학률, 전체 재학생 정원 중 몇 명이 등록했는지가 재학생 충원율, 전체 졸업생 중 진학자나 입대자를 제외한 사람을 분모로 하고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회사에 들어간 사람을 분자로 해서 계산하는 것이 취업률이다. 기본은 신입생·재학생. 올해도 입학처의 비장한 당부와 함께 신입학 전형을 진행했다. 인구 절벽에 코로나19로 인한 교육의 질 저하로 지원자가 급격히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교수들은 입학 면접 때 우수한 학생을 뽑으면서도 내심 나가지 않을 것 같은 학생이 누구일까 타진해본다. 전형이 끝나고 나면 교수가 직..

머리카락은 고민을 먹으며 자라는가 보다. 없는 살림에 왜 그렇게 빨리 무성해지는가. 어릴 적 동네 이발소는 제법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주인 혼자 하기에는 감당이 안 되어서 이발사, 면도하는 아가씨, 머리 감겨주는 청년이 따로 있었다. 각각 전문가가 담당하는 소규모 분업 체제를 갖춘 셈이었다. 들쭉날쭉하던 내 지식과 교양과는 달리 머리카락만 은밀한 속도로 수북하게 자랐다. 해서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이발소를 다녀야 했다. 팔도 사투리를 진하게 구사하는 달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어느 연속극. 이발소에서 머리를 전문으로 감겨주는 청년이 맞선을 보고 와서 주인에게 말한다. 이제 결혼할 여자 앞에서 생색이라도 내어야 하지 않겠냐며 승진을 시켜달라고 조른다. 조금은 같잖게 눈을 흘기던 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수사 과정에서 휴대전화 잠금 해제를 강제할 수 있는 법률안(일명 ‘한동훈 방지법’)을 검토하라고 지시하자 정치권은 물론 시민사회에서도 헌법 유린이라는 비판과 비난이 쏟아졌다. 피의자에게 방어권이 보장되어야 하고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논거다. 언론과 시민단체, 말 깨나 좀 한다는 사람들이 인권옹호자가 되어 공격대열에 합세했다. 장관의 지시에 침묵만 지키는 민변 출신 여당 국회의원들을 향해 참을 수 없이 화가 난다는 전직 국회의원도 있었다. 국민의힘은 “헌법도 보이지 않는 법무부(法無部) 장관, 오로지 ‘내 편’만을 위한 인권”이라는 논평을 냈다. 평소 인권에는 관심도 없거나 애써 외면했던 이들조차 맹비난에 가세했다. 차라리 고문을 허하라는 극단의 비판도 들어야 ..
조국 민정수석(직권남용 등 12개 혐의), 한병도 정무수석(선거개입), 전병헌 정무수석(뇌물), 신미숙 인사비서관(환경부 블랙리스트), 송인배 정무비서관(불법정치자금), 백원우 민정비서관과 박형철 반부패비서관(감찰 무마와 선거개입), 최강욱 공직비서관(허위 인턴증명서, 선거법 위반), 윤건영 상황실장(회계부정) 등등. 이렇게 많은 이들이 각종 비리에 연루되었다. 일찍이 이런 청와대가 또 있었던가. 수사가 중단되지 않았다면 이 목록에 비서실장 이름까지 실릴 뻔했다. 최근에는 라임·옵티머스 사태와 관련해 경제수석실 행정관, 민정비서실 행정관, 민정비서실 수사관이 구속되거나 조사를 받고 있다. 얼마 전에는 월성 1호기 폐쇄와 관련해 검찰에서 청와대 산업정책비서관을 지낸 채희봉 한국가스공사 사장의 휴대전화를 압..

자굴산, 벼룩콧등, 수도사, 봉황대, 탑바위, 한우산. 관광안내지도에서 처음 보는 저 이름들을 중얼거려본다. 이런 고유명사를 불러주는 게 곧 이 고장을 알아가는 지름길이다. 여기는 의병의 고장인 경남 의령의 충익사 광장이다. 저 낯설고 재미있는 이름 중에서도 ‘함안층 빗방울자국(천연기념물제196호)’이 단연 마음을 끌어당겼다. 세상에, 빗방울 화석이라니! 그 어느 눈 밝은 사람이 공룡의 발자국 옆에서 빗방울을 캐내었단 말인가. 내력은 다음과 같았다. “중생대 백악기의 평원 위에 빗방울이 찍힌 흔적이 굳어진 것으로 (…) 약 1억년 전 건조한 평원 위에 한때 비가 내리면서 진흙 위에 빗방울자국이 찍히고, 그 위에 퇴적물이 덮이면서 굳어져 암석이 된 후에, 위에 덮였던 퇴적암이 오랜 세월의 침식작용에 의해 ..

온몸으로 종을 쳐서 은혜를 갚은 까치의 전설을 접한 이래 치악산은 일찍이 머리에 각인된 산이다. 군대와 친구 등 원주에 관계된 일도 무시로 있어서 자주 기억에 소환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조금 우울한 느낌으로 치악산과 맞닥뜨려야 했다. 사연이 있다. 오래전 회사 야유회를 치악산으로 간 적이 있었다. 산에 대해 아무런 개념도 없었던 터라 어느 중턱에서 그냥 발길을 돌려 닭백숙집으로 직행하고 말았던 것. 까마득히 잊은 줄 알았는데 특히 강원도 쪽으로 산행할 때마다 그 못난 행각이 슬금슬금 기어나오는 것이었다. 내 삶이 너덜너덜하다면 바로 이런 사실들이 모여서 그렇게 되는 것. 여러 곡절 끝의 어느 날 오후 두 시. 치악산의 황골을 혼자 오르기 시작했다. 뒤에는 안간힘을 다해 받쳐주는 내 그림자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