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손잡은 한식은 권력자를 위한 장식에 지나지 않았다. 권력자에게 한식을 바친 사람은 중세 궁중의 하인에 지나지 않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처 김윤옥이 끼어든 한식 세계화 사업, 그리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아래 사라진 미르재단의 “‘한식 DNA’를 품은 글로벌 셰프 양성” 기획 속의 한식은 그들만을 위한 한식을 대변한다. 여기서 만들어진 한식은 한국인이 먹어본 적도 없고, 한국인이 먹을 일도 없는 한식이다. 다만 사진과 영상은 잘 받아서, 특정 인물을 위한 장식품으로는 꽤 쓸 만한 소품이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를 통해 범죄의 내막이 새로 밝혀지고, 장관과 재벌이 재판에 넘겨지자 많은 사람들이 시원해했다. 하지만 한식은 여기서도 찬밥이었다. 최경희 전 이화여대 총장은 국정조사 특위 제4차 ..
얼마 전 페미니즘과 관련된 프로젝트 제의를 받으면서 갈등한 적이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갈등은 다소 복잡한 것이었다. ‘나같이 평범한 사람이 무슨 대단한 페미니스트라고’라는 겸양도 들어있지만, 한편에는 페미니스트라고 분류되는 순간 감당해야 할 많은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늘 올바르고 도덕적이며 자기주장이 강한 여전사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남녀가 함께 모여 사는 세상에서 분리되어 여자로만 가득 찬 울타리 안에서 옳은 소리만 하는 운동가의 이미지도 떠오른다. 나는 아직 그곳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인권 운동가나 투사가 되기에는 너무 자기중심적이며 멋대로인 데다 그렇게 도덕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남자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 많은 의미에서 나는 아..
사랑하는 이가 어느 순간 떠나고 나면 남는 것은 ‘진실’에 대한 기억뿐이다. 건너가지도 못한 진실, 건너갔으나 닿자마자 변형된 진실, 나에게 비로소 도달했으나 알 수 없었던 그의 진실. 상호모순되는 진실들이 어느 순간 뒤죽박죽 엉키면서 안개가 어리기 시작한다. 우리의 진실이 어느 시공간에서 부유하고 있는지 어디선가 공허한 바람 소리도 난다. 그때의 진실을 이제 와 감정으로 만져본 것뿐이데 어느새 해지고 있다. 진실은 본래 그토록 연약한 것일까. 박사 과정 초기 시절 꽤나 여러번 지도교수들과 사회과학에서의 ‘사실’과 ‘의견’에 대해 논쟁을 했다. 어느 날 나는 두 분의 지도교수들에게 한국과 일본의 비정규직 확대에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연구해보겠다고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분이 나..
2016년 10월24일 오후 2시38분. 여성 수천명이 아이슬란드의 거리로 뛰쳐나왔다. 남성에 비해 평균 14~18% 적은 임금을 받는 것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임금격차로 보자면 여성들은 매일 2시38분 이후부터는 공짜로 일하고 있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다. 이어서 11월7일 오후 4시34분에는 프랑스 여성들이 손에서 일을 내려놓았다. 성별임금격차 15.5%를 기준으로 봤을 때, 여성들은 이날, 이 시간부터 연말까지 무급 노동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항변이었다. ‘이퀄 페이 데이(Equal Pay Day·동일임금의 날)’로 불리는 이 시위는 같은 해 11월10일 영국으로도 이어졌다. 이뿐 아니다. 호주의 한 대학 여성 모임은 ‘페미니스트 주간’을 맞아 임금격차분을 반영하여 남성에게는 컵케이크를 더 비..
대리운전을 하다가 손님의 차를 긁었다. 폭이 그다지 넓지 않은 기계식 주차장에서 차를 빼다가 그렇게 됐다. 아무래도 조수석의 사이드미러가 긁힌 것 같았다. 손님, 그러니까 차의 주인은 이거 어쩌지, 하는 한숨을 쉬면서 창문을 열어 긁힌 데를 살폈다. 사실은 그가 “여기 괜찮아요”라고 말했고 그래서 엑셀을 밟은 것이었다. 무언가 억울하기도 했으나 나는 죄인이 되어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손님은 나에게 어두운 표정으로 “조금 긁힌 것 같네요”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목적지로 가는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불편한 타인의 운전석이었다. 여러 감정들이 복잡하게 교차했다. 우선은 나의 미숙함으로 소중한 차에 흠집을 냈으니 미안했고, 그러면서도 외제차가 아니라는 데 안도했다. 나는 왜 고작..
“할 말 있으면 해봐.” 길에서 누군가가 훈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어르신이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잔뜩 풀 죽은 채 함구하고 있었다. 모종의 권력이나 권위가 작용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누군가 힘을 내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그땐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어르신의 입에서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왔다. “아시다시피? 그게 할 말이야? 너희가 아직 어려서 그래.” 젊은이들의 입이 더욱 굳게 닫혔다. 다시 가던 길을 재촉하는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할 말만 하라는 것도 우습지만, 할 말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주체가 발화자 당사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기가 막혔다. 젊은이들의 생각은 입 밖으로 새어 나올 여지가 아..
지금보다 좀 더 어렸을 때, 장래희망은 ‘욕쟁이 할머니’였다. 대중매체로 접한 욕쟁이 할머니들은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살지만 누구에게도 비난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그게 부러웠다. 소비자 갑질 사건이 빈번히 발생하는 대한민국에서, 식당 주인이 퉁명스럽게 면박 줘도 손님들이 얼굴 찌푸리지 않고 넉살 좋게 대응하다니! 유력한 대통령 후보에게 이놈, 저놈 해도 관용의 대상이 됐다. 모든 권력관계로부터 해방된 존재로 보였다. 하지만 ‘어떤’ 욕쟁이 할머니는 불쾌감을 선사하는 존재였다. 얼마 전 허리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의 남자 친구와 같이 동네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는데, 그곳 주인 할머니가 식당에 있는 사람들 모두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남자야, 여자야?” “남자요...
크로아티아의 작은 도시, 스플리트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른 아침, 텅 빈 거리를 걷다가 한글 간판을 발견했다. 딱 봐도 한국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가게 앞에서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가게를 열기까지의 고생담과 크로아티아 행정에 대한 성토가 쏟아졌고, 계산대에 서 있던 아내 분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부가 방금 전까지 심하게 다퉜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남편은 이 도시에 단 3명밖에 없는 한국인 중 2명이 바로 자신들이며, 나머지 한 명은 현지인과 결혼한 분이어서 자신들보다 낫다고 했다. 그래도 한국 사람이라고 10% 할인을 해주는 가게에서 몇 가지 물품을 사서 나왔지만, 무거워진 마음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눈앞에서 외국 생활의 생생한 민낯을 목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