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훈 | 소설가 대통령 선거 다음날 혼자 배를 몰고 나가 바다에 떠 있었다. 먹장구름이 남동쪽으로 몰려가고 파도가 연이어 뱃전을 때렸다. 이 기분은 뭘까. 오년 전에 느꼈던 좌절이나 분노와는 다르다. 좌절과 분노는 목표가 생긴다. 어감만 강렬하지 날씨가 나빠지면 낙담하는 것과 비슷하다. 견디고 이겨내려는 자세가 만들어진다. 우린 이렇게 말해온 세월을 살았다. ‘얼마나 더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까.’ 그 말이 맞는다면, 정신을 차리는 그 순간까지 훼손과 고난은 어쩔 수 없는 필요악 같은 게 된다. 그 기간을 견뎌내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게 되는 지혜가 생긴다, 고 나는 생각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로지 슬픔뿐이다. 앞으로도 기득권자들은 높고 튼튼해지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낮고 비참해질 것이다. 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그제 첫 인사를 단행했다. 당선인 비서실장에 유일호 새누리당 의원, 수석대변인에 윤창중 ‘칼럼세상’ 대표를 임명했다. 박 당선인은 전문성을 고려한 인선이라고 설명했다. 유 비서실장이 한국조세연구원장을 지낸 경제전문가이고, 윤 수석대변인이 문화일보 논설실장 출신의 언론인이라는 점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당선인 쪽에서는 친박근혜계 핵심인사와 영남 출신을 배제한 점도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 당선인의 첫 인사는 매우 중요하다. 취임 후 어떠한 세력, 어떠한 인사들과 함께 정부를 운영해 나갈지 보여주는 시금석이 되는 까닭이다. 우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윤 수석대변인 임명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윤 수석대변인은 칼럼과 종편 방송에서 자극적인 언어와 색깔론으로 야권·진보진영을 공격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오늘 기어이 문을 연다. 우리가 살아온 당대의 파란만장했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자부심도 갖고 성찰도 할 수 있는 공간이 탄생한 것은 경축해야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건립 과정에서 지적된 수많은 문제점을 도외시한 채 밀어붙이듯 서둘러 개관한 것이 우선 아쉽기 그지없다.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역사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통합과 비전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는 국민 교육의 장이 돼야 할 곳이 되레 분열과 퇴행의 진원지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기까지 하다. 역사박물관은 이명박 정부가 2008년 건국 60주년 기념 사업의 하나로 시작할 때부터 논란과 잡음에 휩싸였다. 이 대통령이 “고난과 역경 속에서 발전한 자랑스러운 기적의 역사를 기록하고 후세에 전승…”이라고 언급한 건립 취지부터 산업화·민주화 ..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첫 행보로 현충원을 찾아 ‘새로운 변화와 개혁의 시대를 열겠습니다’라고 방명록에 적었다. 그리고 이승만 전 대통령과 선친인 박정희,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했다. 새누리당 당사에서 발표한 대국민 인사에서는 “저에 대한 찬반을 떠나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또 “과거 반세기 동안 극한 분열과 갈등을 빚어 왔던 역사의 고리를 화해와 대탕평책으로 끊도록 노력하겠다”면서 지역과 성별, 세대를 초월한 ‘100% 대한민국’ 건설을 다짐했다. 박 당선인의 승리는 헌정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의 탄생이라는 외형적 평가 외에 1971년 대선 이후 과반 득표율을 올린 첫 당선인, 호남에서 두 자릿수(10.4%) 지지를 얻어낸 첫 보수 후보 등의 성과들을 거뒀다. 자신의 ..
이필렬 |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민주주의 없이도 경제성장은 가능하다. 치안유지와 좁은 의미의 평화도 가능하다. 전두환과 박정희의 독재 치하에서도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했고 밤거리는 안전했다. 그러나 녹색으로 상징되는 가치가 결실을 맺는 세상은 민주주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진정한 녹색 세상은 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상상력과 창조력이 한껏 펼쳐질 수 있을 때라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창조력과 상상력은 그저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을 최고라고 생각하는 기득권 세력의 시각에서 보면 매우 불온해 보일 수 있다. 자전거 ‘대로질주단’이 광화문 앞 세종로의 차선 하나를 온통 차지하며 달려가고, 도시텃밭 ‘게릴라단’이 서울 곳곳의 방치된 땅에서 텃밭을 일구고, 조합원들이 평등하게 한 표씩 행사하는 협동조..
지난 대선은 범보수와 범진보 사이의 대접전이 높은 투표율로 나타났고, 이것이 박근혜 후보를 1987년 민주화 이후 첫 과반수 당선인이 되게 만들었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박 후보를 지지하지 않은 유권자도 절반 가까이 상존한다는 뜻이다. 문재인 후보가 얻은 표는 1445만여표로 당선인보다 108만표 적었으나 득표율은 48%에 이르렀다. 정권교체의 희망은 5년 뒤로 넘겨졌지만 이 숫자의 의미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새로운 정치에 대한 희망을 끄지 않고 이어가야 할 분명한 이유이자 증좌이기 때문이다. 이 48%가 갖는 소회는 여러가지일 것이다. 더러는 정권교체와 새 정치에 대한 열망이 너무나 강렬했던 만큼이나 좌절감을 넘어 억장이 무너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철탑 위에서 칼바람 맞으며 고공농성을 벌이..
대선에서 패한 민주통합당이 깊은 침묵과 혼돈에 빠져들었다. 정권교체 여론이 60%에 이르고 범진보진영이 총결집하는 등 ‘지려야 지기 힘든’ 선거에서 패한 후유증이다. 이번 패배 역시 4·11 총선 때와 마찬가지로 오만과 나태의 합작품이라고 본다. 실수도 반복되면 실력이다. 민주당은 이대로라면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처절한 자기반성을 토대로 창조적 파괴에 나서야 할 때다. 문재인 후보는 어제 선대위 해단식에서 “(대선 패배는) 전적으로 제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도 “후보의 부족함 외에 많이 얘기되던 ‘친노’의 한계일 수도 있고, 민주당의 한계일 수도 있고, 중간층 지지를 좀 더 받아내고 확장해나가지 못한 부족함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타당한 지적이나 이미 늦었다. ..
이현 | 동화작가 ‘중딩’이 제일 무섭다고들 한다. 오죽하면 중2가 무서워서 그 누구도 한국으로 쳐들어오지 못할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그런데 서울시교육감 선거에 나선 문용린 후보가 참으로 용감한 발언을 했다. 토론에서 ‘학생들은 미성년자고 인권도 마찬가지’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그 무섭다는 중2병을 모르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무시할 만해서 무시한 거라고 보는 게 맞겠다. 제 아무리 센 척 해봤자, 중2에게는 그 한 표가 없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은 물론 고등학생도 투표권이 없다. 그러니 선거 때가 되어도 후보들은 청소년들 눈치를 보지 않는다. 대통령 후보들은 물론 교육감이 되겠다는 후보들조차 그러하다. 빈말이라도 학생님들의 인권은 소중하다고 다소곳이 고개 숙이는 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