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 답이 있다.’ 자주 쓰이는 말이다. 한 해를 보내고 또 새해를 맞이하는 중에, 불가피하게 일종의 연말결산 같은 몇 군데의 공적 회의에 참가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모든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가 ‘현장에 답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네댓 번 들으면서 내내 생각했다. 현장에 답이 있다? 그런데 그 ‘현장’은 어디인가?우선 문자 그대로 ‘물리적 현장’이 있다. 눈으로 확인이 가능한 현장 말이다. 공연장이라면 무대의 음향이나 조명 시설에서부터 관람객의 동선에 따른 주차장이나 객석 의자를 점검할 수 있다. 스포츠의 경우에는 운동장이나 훈련장의 시설들 그리고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행위 패턴을 분석할 수 있다. 이로써 노후 장비를 보수하거나 교체하고 이용자들의 불편 사항을 개선할 수 있으며 더 적극적..
2013년이니까 6년 전의 일이다. 한화는 한국시리즈 우승 10회에 빛나는 김응용 감독을 새 감독으로 영입했다. 기대가 컸지만 앞선 겨울 에이스 류현진이 메이저리그로 떠난 한화의 출발은 썩 좋지 않았다. 4월의 날씨는 25도를 오르내리며 초여름을 방불케 했지만 한화 더그아웃은 냉기가 가득했다. 시즌 시작 뒤 연패가 9개까지 쌓였다. 개막 후 10번째 경기를 앞두고 야구장에 나타난 선수들의 머리는 봄볕 속에 더욱 새파랗게 빛났다. ‘삭발’이었다. 외야수 정현석은 아예 눈썹까지 박박 밀었다. 의지와 각오를 잔뜩 드러냈지만, 야구는, 세상의 모든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의지와 각오만으로 풀리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연패가 끊어진 것은 4패나 더 이어진 뒤였다.13연패를 끊던 날, 김응용 감독은 감독 통산 147..
다시, 유럽의 축구장이 인종차별로 혼란스럽다. 수년 전부터 국제축구연맹(FIFA)과 유럽축구연맹(UEFA)이 축구장 안팎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 행위를 근절하려 막대한 비용을 들여 다양한 캠페인을 벌여왔으나, 이 끔찍한 악행이 근절될 수 없는 역병처럼 번지고 있다.최근의 사례를 보면, 지난 8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미드필더 프레드는 지역 라이벌 맨체스터 시티와의 원정경기에서 연거푸 모욕을 당했다. 코너킥을 차려는 그에게 맨시티 팬은 원숭이 소리를 내며 조롱했고 어디선가 라이터까지 날아왔다. 성난 얼굴을 한 동료 린가드가 프레드는 감싸안으며 위로했지만 프레드의 고통은 단지 라이터에 맞은 외상만은 아니었다. 안정을 되찾은 프레드는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는 아직 어두운 면이 있다. 지금..
스포츠 국가 대항전 중 가장 주목도가 높은 것은 역시 한·일전이다. 지난달 일본 도쿄에서 열린 2019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 프리미어12를 취재하던 기자들의 주요 관심사도 누가 일본전 선발투수로 등판하느냐였다. 한국 야구대표팀은 보안상의 이유로 일본전 선발을 비밀에 부치고 있었다.기자들은 공 잘 던지기로 이름난 투수들을 유력 후보로 꼽아가며 추리에 열을 올렸다. 대회가 하루하루 진행되던 어느날 문득 한 투수가 홀연히 기자들 사이에서 일본전 선발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는데 누가 봐도 뜻밖이었던 스무 살의 신예였다.혹시나 했던 일은 일어났다. 2020 도쿄 올림픽 출전권을 확보해 여유가 생긴 대표팀이 일본전 선발로 이 젊은 투수를 낙점한 것이다. 베테랑 투수가 등판할 것이라 추측했던 한국 기자들과 일본 대표팀..
종이 위에 물감을 바른 뒤 두 겹으로 접거나 다른 종이를 그 위에 두고 눌렀다 떼어내는 방식의 미술 기법을 ‘데칼코마니’라고 한다. 올 시즌 미국과 한국 프로야구에서 데칼코마니 한 듯 각각 닮은꼴 활약을 펼친 두 ‘외국인’ 투수가 있다. LA 다저스의 류현진과 두산 베어스의 조쉬 린드블럼이 그 주인공이다. 1987년생 동갑내기로 각각 MLB와 KBO리그 최고 수준의 성적을 기록하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두 선수는 MLB, KBO 올스타전 선발 등판과, MLB 사이영상(Cy Young Award) 후보, KBO MVP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평행이론을 펼치며 한국과 미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투수로 자리매김했다.류현진은 올 시즌 메이저리그 개막전에서 커쇼를 대신하여 선발로 나선 이후 29경기에 등판해 ..
MBC 예능 프로그램 를 봤다. 트로트 가수로 데뷔하게 된 ‘유산슬’ 유재석씨가 ‘합정역 5번 출구’를 녹음하는 과정을 담았다. 그 ‘업계’의 고수들, 이른바 ‘세션맨’들이 거의 ‘원샷 원킬’로 연주하는 모습은 흐뭇했다. 과연 ‘인생도처 유상수’라, 세상의 모든 분야에는 마땅히 고개를 숙일 만한 고수들이 있다고 했던가. 한편 예능 프로라서 맘껏 웃기도 했지만 또한 그 고수들이 살아냈을 세월을 짐작하니 조금은 숙연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어느 분야든 묵묵히 한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어디 음악계만 그러하랴.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일하는 분야에서는 그와 같은 고수들, 장인들, 누군가를 빛내는 세션의 자리, 묵묵히 그 분야를 오랫동안 떠받치고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 ‘머리’로 일하는 사람들은,..
야구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큰돈을 들여 비싼 선수를 데려오는 게 ‘왕도’에 가깝지만, 비싼 선수들 모아놓는다고 우승할 수 없다는 걸, 미국과 한국의 많은 팀이 스스로 증명했다.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은 야구는 물론, 우리들이 살아가는 거의 모든 곳에서 ‘진리’에 가깝다. 그렇다면, 구슬을 꿰는 ‘실’은 어디에 있을까. 누가 어떻게 꿰어야 할까. ‘팀워크’라는 건 진짜 있는 걸까.매년 MIT에서는 ‘슬로언 스포츠 분석 콘퍼런스’라는 회의가 열린다. 2017년 슬로언 콘퍼런스에서 독특한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인디애나대학 켈리경영학스쿨 교수와 시카고 연방준비은행 연구원 둘이 함께 연구했다. ‘리더십’이 뛰어난 선수 한 명이 팀에 어떤 긍정적 결과를 낼 수 있는지를 분석했다.연구 결..
“텅 빈 관중석 앞에서 열린 기이한 경기(미국 워싱턴포스트)”, ‘가장 비밀스러운 월드컵 예선 경기’로 “중계방송도, 팬도, 외신도, 그리고 골도 없었다(영국 데일리메일)”, ‘기괴한 경기’였으며 “경기 결과는 부차적이었다”(독일 축구 전문지 키커). 지난 15일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북한의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예선 H조 3차전에 대한 외신들의 표현이다. 29년 만의 축구대표팀 평양 원정 경기가 평창 동계올림픽 때처럼 남북 평화의 물꼬를 틀기를 기대한 것과 너무나 딴판이다.남측 중계진의 방북을 불허할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이날 평양 경기 장면은 상상 이상으로 썰렁했다. 경기 전날 4만명 관중이 구경할 것이라는 북한 측의 귀띔도 지켜지지 않았다. 상대팀을 안방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