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29일 이태원에서 일어난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다수의 시민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끼고,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며 공적 책임을 다하기를 촉구하는 시간을 지나고 있다. 시민들의 목소리는 우리가 믿었던 공동체의 가치와 이상, 즉 모두가 안전하게 공적 공간에서 활동하면서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이 훼손된 것에 대한 슬픔과 분노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회적 재난에서 공적 애도가 중요해진다. 희생자의 명복을 빌고 유족에 대한 위로와 부상자의 쾌유를 비는 기원을 건네면서 이 문제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 정부의 책임을 묻고, 시민의 입장에서 어떤 공동체적 실천이 필요한지를 함께 이야기하는 사회적 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공적 애도를 위해 언론이 어떤 역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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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는 또 달라졌어 입동 하루 전에 찬비가 내리고 두꺼운 옷을 내 입고 강을 건널 때 어제로는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거 끝까지 가야만 처음에 도달한다는 거 분명 어제와는 달라졌어 몸서리쳐지는 도약 아니면 추락일지도 모르지 두려움일까 아픈 기쁨일까 오늘은 어지러운 모습으로 달라졌어 써지지 않던 시가 급습할 것만 같지 이게 다 사랑의 힘인 것도 같고 지금껏 자초한 일들의 숨가쁜 업보인 것도 같고 하지만 더 아파도 좋다는 고독이 찾아왔다는 느낌에 나는 강을 건너고 눈앞은 여전히 황야야 별들이 가득 울고 있는 전율이야 황규관(1968~) 상강과 소설 사이의 입동은 겨울의 시작이다. 겨울나기를 위해 인간은 서둘러 김장을 하고, 산짐승은 굴을 파고 들어간다. 입동 당일에 날씨가 추우면 그해 겨울은 몹시 춥다고 ..
156명의 생명이 스러진 이태원 핼러윈 참사의 ‘국가애도기간’이 지난 5일 끝났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님을 우리 모두는 안다. 윤석열 대통령은 참사 다음날인 지난달 30일 대국민담화를 통해 5일까지를 ‘국가애도기간’으로 선포하고 “사고 수습 및 후속 조치에 국정의 최우선 순위를 두겠다”고 했다. 국가애도기간에 윤 대통령은 매일 희생자 분향소를 찾았다. 출근길 문답은 하지 않았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국가애도기간은 말보다는 고개를 숙이는 애도의 시간이 돼야 한다는 것이 대통령의 뜻”이라고 했다. 참사 사흘 만인 지난 1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과 윤희근 경찰청장 등 관계기관 수장들이 공식 사과했다. 경찰의 112신고 접수 녹취록 공개로 정부의 부실 대응이 뚜렷이 드러난 날이다. 윤 대통령의 사과 메시지는 ..
나쁜 문화는 ‘나쁜 걸’ 장려한 결과가 아니다. “여자들은 문제가 많아”라는 성차별적 인식은 기질적으로 여성이 싫은 사람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남성성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사회에서 파생된 편견이다. 남자는 이렇게 해야지 멋있다는 식의 주문이 많으면 “남자가 그것도 못해?”라는 핀잔에 이어 “너 여자야? 그런 것도 못하게”라는 빈정거림이 자연스레 등장한다. ‘천생 여자’라는 감탄사를 제어하지 않고 성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건 소용이 없다. 사회적 문제에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반대의 힘이 존재한다. 그걸 찾지 않는 해법은 소 잃고도 외양간조차 고치지 않는 격이다. 외모 지상주의가 사라지길 원한다면 사람의 얼굴, 몸, 옷차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문화부터 짚어야 한다. 잘생긴 사람에게 환호하고 몸매..
속초에 다녀왔다. 설악산과 동해안 사이에 자리한 이 아름다운 땅에서라면 유쾌하고 가벼운 잡지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실향민 사진가가 찍은 낡은 설악산 사진집, 이북 출신 고깃배 선장이 손으로 쓴 자서전 같은 것을 찾아다니며 분주한 가을을 보냈다. ‘속초(束草)’라는 이름은 ‘묶을 속(束)’자와 ‘풀 초(草)’자를 쓴다. 읍이나 면이 아닌 ‘시’의 명칭이 이렇게 소박한 한자어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 어원은 분분하다. 속새풀이 많아서, 영금정 옆 솔산이 소나무와 풀을 묶어둔 것 같은 모습이라서, 속초의 지형이 하필이면 누운 소를 닮아서, 심지어 울산바위에 새끼줄을 묶어줄 테니 도로 가져가라며 울산 원님에게 대들었던 신흥사 동자승이 있어서. 이 모든 이야기가 멋지고 예쁘다. ..
윤석열 대통령이 참사 이후 6일 만에 처음으로 사과의 뜻을 밝혔다. 공식 브리핑도 아닌 외부 추모 행사에서, 무능했고 책임 회피에 급급한 정부 인사에 대한 어떠한 언급조차 없는 공허한 사과였다. 참사에 제대로 된 책임을 지는 시작점이 될지, 책임 회피를 위한 변명에 그칠지는 대통령의 이후 행보에 달려 있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경찰의 ‘셀프 수사’를 선택했다. 이미 세월호 참사 당시 해양경찰청이 합류한 합동수사본부가 해경의 구조 실패 책임을 제대로 묻지 못한 전적이 있다. 경찰의 지휘권자들이 참사 이후에도 자리를 지키는 상황에서, 참사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을 가진 경찰을 진상규명의 주체로 신뢰하기란 불가능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수사는 법률 바깥의 제도적, 구조적 문제를 단죄할 수..
국가가 없는데 권력자는 있는 나라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 모습이다 만약 우리에게 정치지도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당부한다 책임에서 도망치지 말라고 내 직업은 정치철학자다. 정치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직업으로 정치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정치’를 좋아한 건 아니었다. 막스 베버의 를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베버는 은유적으로 말한다. 정치가란 ‘악마적 수단’으로 ‘천사적 대의’를 실현하는 사람이라고. 한편 정치가들에게 현실적으로 당부한다. 대표로서 헌신을 다하는 열정을 가지라고, 대표로서 책임을 다하라고, 그 열정과 책임 사이에 균형감각을 지니라고. 더하여 나를 사로잡은 건 정치가에게 필요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였다. 신념윤리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도덕적 선을 선택하는 태도라면, 책임윤리는..
10일 헌법재판소는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제19조 전파매개행위금지조항(이하 전파매개행위죄)과 제25조 처벌조항의 위헌 여부에 대해 공개 변론을 진행한다. 2019년 12월 서울서부지방법원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고 3년이 지나 열리는 것이다. 이 법은 HIV 감염인이 혈액 및 체액을 통해 전파매개행위를 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1987년 제정된 이래 크게 바뀌지 않은 법 조항은 치료법이 발전하여 감염인이 꾸준히 치료제를 먹으면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고 전파할 수 없는 지금도 과거의 공포에 기반한 엄벌주의를 고수한다. 전파매개행위죄는 무엇이 전파매개행위인지, 체액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는다. 서로 콘돔 없는 성관계를 합의했을지라도 감염인은 재판의 대상이 된다.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