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핼러윈 참사 소식을 접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이랬다. 죽음을 정쟁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 당분간 애도기간을 갖자는 여권 인사들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없이 생을 마감한 희생자와 가족들의 상실감, 사회를 짓누르는 슬픔의 공기를 생각하면 조용히 명복을 비는 것이 도리라고 여겼다. “이태원 참사는 청와대 이전 때문에 일어난 인재”라는 민주연구원 부원장이나, 세월호 사태에 빗대려는 일각의 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여겼다. 치유되지 않은 세월호를 정치적 의도로 헤집는 데 동의할 수 없었다. 난잡한 정치판에도 금도는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경찰 녹취록이 사고 3일 만에 공개되면서 국면이 바뀌었다. 녹취록에 따르면 사고 발생 약 4시간 전부터 “난리가 났다” “압사당할 것 같다”는 112신고가 ..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가던 시절부터 아무개는 소금을 캐러 다녔다. 서쪽 하늘에 초승달이 보이는 시기에 길을 떠나, 야크들을 몰고 잿빛 땅뿐인 세상을 가로질렀다. 밤하늘에 보름달이 나타날 즈음이면 긴 여정이 끝났다. 호수를 뒤덮은 신의 은총이 달빛에 하얗게 반짝이는 것을 오래 바라보곤 했다. 두 번째 소금 길에서는 먼저 호수로 출발하여 자루 100개에 소금을 채워둘 네 사람으로 뽑혔다. 짐승을 돌보며 뒤따르는 일은 노련한 어른들이 맡았다. 선발대가 떠나기 전날 밤, 마을의 촌장이 힘 좋고 걸음 빠른 네 젊은이를 불러 모았다. 그리고 반짝이는 하얀 조각을 하나씩 입에 넣어 주었다. 태어나서 처음 경험한 맛, 가라앉지 않는 허기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맛이었다. - 보리를 소금으로 바꿔 간 이에게 얻은 설탕이다...
1997년 2월15일 MBC 에서 밴드 삐삐롱스타킹은 한국 방송 역사상 손꼽히는 사고이자 대중음악 역사상 기억될 만한 이벤트를 만들었다. ‘바보버스’를 부르면서 보컬 고구마가 카메라에 손가락욕을 했고, 기타리스트 박현준은 침을 뱉었다. MBC는 곧바로 이들을 출연정지시켰지만, 밴드가 곧 해산했기에 출연정지 조치는 별 의미가 없었다. 멤버들은 각자 다른 밴드를 결성하거나 영화음악을 작곡하며 유유히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유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 있는 가사(“잘난 척 하지마 똑바로 살아봐 첨으로 돌아가 단추를 풀어봐 … 주위를 둘러봐 빗자루 한마리 쓰레기 두마리 짜증날 것 같아요”), 경기 들린 듯한 무대 매너는 이날의 사고가 ‘의도된 파국’이었음을 암시한다. 지금보다 연예계에 미치는 지상파 방송사의 권력이..
2019년 첫째가 태어나며 출산지원금을 지역화폐를 통해 지원받은 이후 재난지원금 사용 및 현금 충전으로 정말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는 지역화폐는 나의 소비생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결제수단이 되었다. 지역화폐를 이용하는 주된 이유는 현금 충전 시, 부여되는 인센티브로 좀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물건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인데 지자체별로 또한 기간에 따라 다르지만 충전금액의 5~10% 수준에서 부여되는 인센티브는 신용카드사 포인트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큰 혜택이다. 단, 발행목적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곳이 거주지역에만 한정되며 사행성 업소나 백화점, 대형마트 및 지정 매출액 이상인 상점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는 제한이 있다. 이 제한은 인센티브 혜택을 통해 지역화폐 거래량을 늘려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윤희근 경찰청장이 지난 1일 경찰청에서 ‘이태원 핼러윈 참사’와 관련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 윤 청장은 참사 전 112신고가 다수 있었지만 현장 대응은 미흡했다며 “읍참마속의 각오로 감찰과 수사를 벌이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읍참마속(泣斬馬謖). 큰 목적을 위해 자기가 아끼는 사람을 버린다는 뜻이다. 군령을 어기고 멋대로 전투를 지휘하다 참패한 마속을 제갈량이 눈물을 머금고 참형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윤희근 경찰청장이 ‘이태원 핼러윈 참사’에 대해 사과하며 이 고사성어를 인용했다. 윤 청장은 참사 전 시민들의 112신고가 다수 있었지만 현장 대응은 미흡했다면서 “읍참마속의 각오로 감찰과 수사를 벌이겠다”고 말했다. 경찰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부하들을 엄벌하겠다는 의미지만 윤 청장이 대국민 사과에 이 ..

윤석열 정부를 상징하는 구호 중 하나는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이다. 이 말은 용감했지만, 저잣거리에 넘쳐나는 남성문화의 일부이자 30년이 넘은 신자유주의 통치 패러다임일 뿐이다. 물론 ‘구조도 구조적 문제도 없다’는 비현실이다. 우주에서 혼자 사는 것도 증류수 같은 현실도 불가능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사고방식 자체가 사회 구조적 문제다. 구조와 구조주의는 다르다. 구조는 사회의 물리적, 정치경제적, 심리적 관계들을 의미하고 이런 상황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개인은 없다. 혼자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는 개인은 사후에도 성립되지 않는다. 기억되기 때문이다. 반면, 문제의 원인을 개인 몸 외부에서 찾는 사고가 구조주의이다. 성별이든 계급이든 구조적이지 않은 문제는 없지만 구조에 대한 개인의 ..
“집으로 돌아온 이후, 도저히 뉴스를 볼 수가 없어요.” 현장에서 정신없이 심폐소생을 하고 돌아온 20대 여성은 아직도 재난 한복판에서의 자신의 경험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멀리서 복잡한 현장에 접근조차 못했던 응급구조원의 목소리가 쟁쟁했다. “더 세게 하셔야 해요!” 그 여성은 마치 자신의 부실한 심폐소생술로 인해 결국 희생자의 죽음을 초래한 것은 아닌지 자신을 탓하기 시작했다. 미디어를 통해 당시 장면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대중이 모인 행사장에 다시는 못 갈 것 같은 두려움에 빠진다고 했다. 비극적인 사고의 현장에서 도움을 주려고 했던 이들이 겪는 이러한 정서적이고 인지적인 어려움을 ‘대리외상’(vicarious trauma)이라고 부른다. 여러 전문가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공간에 재난 ..
세상은 온통 이태원 참사로 슬픔에 잠겨 있지만, 국방부와 군은 열흘 전 일로 침잠해 있다. 서욱 전 국방부 장관의 구속이 남긴 충격파가 작지 않아서다. 서 전 장관의 구속이 왜 군을 충격에 빠뜨렸는지, 몇개의 장면을 통해 되짚어보자.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두 달이 되어가던 지난 7월7일, 합동참모본부는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대응 과정에서 군이 군사정보통합처리체계(MIMS·밈스)의 첩보를 삭제했다는 KBS의 보도를 반박했다. 불법 삭제가 아니라 불필요한 첩보의 열람을 막기 위해 배포선을 조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군의 이런 주장은 결국 무시됐다. 정부는 국가정보원과 검찰, 감사원을 총동원해 수사한 끝에 지난달 22일 서 전 장관과 김홍희 전 해양경찰청장을 구속했다. ‘윤석열 정부의 군’의 ..